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앙리 피렌 지음|강일휴 옮김|삼천리|384쪽|2만5천원

유럽사에서는 ‘야만적인’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문명화된’ 로마 제국이 분열되며고대가 종결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벨기에의 역사학자 앙리 피렌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이슬람과 유럽 두 문명권의 상호 작용에 근거해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새롭게 설정했다. 

 『중세도시』에서 도시를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연구한 저자는 아날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 연표에 제시된 단편적 사건을 넘어 종교 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파악하는 피렌의 연구는 정치사나 연대기가 아닌 사회사, 구조를 중시하는 아날학파의 학문 기조와 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5세기 무렵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중세 시작으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부정한 바 있다. 그는 ‘마호메트’로 대변되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이 고대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샤를마뉴’로 대변되는 중세 시대를 열었다는 주장으로 후대 역사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지중해적 통일성’은 고대 유럽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이 로마 문명의 사상, 종교, 상품 등을 공유하며 형성됐다. 저자는 게르만 세력이 로마세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문명에 동화돼 지중해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황제가 사라졌으나 게르만족에게 흡수된 언어·종교·제도 같은 로마문명의 본질적인 특성은 존속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존 서양사 연구에서 고대사와 중세사 구분에 고려되지 않았던 비잔틴 제국의 역사도 고대사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통찰력을 보인다. 로마황제 통치 체제의 붕괴로 황제가 없던 서방은 종교적 권위를 지닌 황제의 상징성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 서방은 비잔틴 제국과 접촉하며 동방의 우수한 고대 유럽문명을 받아들였다. 저자는 이처럼 서방 세계가 비잔틴 제국의 문명을 수용해 지중해적 통일성을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시켜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편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대립해온 역사적 배경은 역설적으로 유럽에 중세 기독교 문명이 자리잡는 데 이바지했다. 기존의 해석과 달리 로마제국의 멸망 후에도 공고히 유지되던 고대의 지중해적 통일성은 마호메트의 이슬람교 창시에 의해 뿌리가 흔들리게 된다. 이슬람 세력은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를 침공해 서방세계를 잠식하며 7세기까지 지중해적 통일성을 함께 유지해온 서방과 동방이 분열되는 양상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프랑크 왕국과 로마교회의 공조체제가 마련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존의 수호자인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위축됐기 때문에 더이상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된 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한 카롤링거 왕조를 택한다. 그 대가로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는 800년에 교황으로부터 ‘신의 은총에 의한 프랑크인의 왕’이란 칭호를 받고 황제로 인정받는다. 이와 같이 저자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중세를 낳았다는 기존의 관점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로마교회가 세속적 권력과 관계가 깊은 중세의 특성을 도출해내고 있다. 

전통 학설에서는 중요히 다뤄지지 않았던 게르만족의 로마화와 비잔틴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언급한 저자는 지중해적 통일성을 끌어들여 고대를 정의하고,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포교활동을 위해 서쪽으로 진출해 지각 변동이 시작됐다는 종교적 맥락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당대의 법률서, 문학 작품, 주교의 편지 등 1차 자료를 활발히 인용한 점은 이 책이 저자 사후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피렌 테제’로 불리는 이유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