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에 빠지다

윤지양


1. 나의 일기는 다른 문장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 어둠 속에서 펜을 찾아들고 이렇게 글을 쓰기까지 몇 번이나 모든 걸 그만 둘까 하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내가 만일 오늘 곤이를 만나기 위해 외출하지만 않았었다면. 아니, 외출을 했더라도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를 탔더라면. 머릿속에서 오늘 내가 결정한 모든 일들에 대한 후회가 뒤엉켜 숨이 막혀온다. 나는 맨홀에 빠졌다.

핸드폰은 떨어지면서 완전히 망가져버렸고,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방은 어둠과 악취, 축축함과 적막뿐이다. 가끔씩 무심결에 몸을 움직일라치면 오른쪽 발목에 통증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온다. 들을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나의 신음 소리를, 부끄러워하고 있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맨홀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도 뚜렷하게 한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것이 생각난다. 왠지 따뜻하면서도 비릿한 것이 마구 콧속으로 돌진해 들어오던 느낌. 바로 전 순간, 내가 내딛었던 한 발자국, 그 발자국 밑에는 나를 받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참 동안 엄청난 속도로 낙하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숨을 잃지 않았던 것은 지금 앉아 있는 작은 소파 덕분이다. 원래는 엎드려뻗쳐 기합이라도 서듯이 뒤엎어져 있던 이 소파 위에 난 떨어졌고, 다행히 끔찍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발목을 다친 것 말고, 별다른 부상은 없다. 난 벌을 서고 있던 이 소파를 끌어안고 실랑이를 한 끝에 그것이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했고, 그 다음 그 위에 올라앉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새 누군가 맨홀의 뚜껑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그것이 내 머리위로 어느 정도 높이에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목이 터져라 외쳐도 으스스하게 무너져 내린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나중에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깨어나자마자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소파를 가지고 씨름하길 선택했을까? 글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뭔가 푹신한 것으로부터 위로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이렇게 이 소파 위에서 내가 맨홀에 빠지게 된 원인을 찾으려고 끙끙거리고 있다. ‘오늘 곤이와의 술 약속만 없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곤이라는 존재를 애초에 몰랐더라면’이라는 보다 궁극적인 후회로 이어지고, 결국엔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왜 내가 사방에서 매캐한 가스가 피어오르고 바닥 전체에 오수가 흐르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구조대원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좀 더 명쾌한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맨홀에 빠져서 머리가 깨져 죽어야 할 만큼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난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곤이가 여자 친구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속으로 둘이 헤어지길 바랐다. 곤이가 울며불며 술주정 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얼마나 통쾌할까 생각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성경에도 하느님은 선한 사람을 시험하신다고 했다. 아, 종교 문제는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더 간명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 나는 맨홀에 빠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깔끔하게. 아무 군더더기 없이. 그냥, 그럴 운명이었다는데, 어떻게 반발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믿어버릴까? 나는 맨홀에 빠져서 소파에 처박힐, 그런 기구한 운명을 띠고 태어난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순진하게 그렇다고 믿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난 그 정도로 단순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지금 분명한 것은, 내가 맨홀에 빠진 원인이 어딘가 분명히 있다는 것과, 그 원인을 아직 내가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이다.


2. 무언가가 내 엄지발가락을 긁어대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다. 쥐다. 온몸의 털들이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아나고 정수리까지 전기가 한번 오르더니, 심장 박동의 전율에 귀가 멍할 지경이다. 나의 소스라침에 놀라 쥐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 잔상은 오래 갔다. 어디를 내딛어도 내 신발 밑에 쥐의 꼬리가 밟힐 것처럼 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난 겁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더러운 물이 여기저기 고여 있는 이 어두컴컴한 하수도에서 쥐는 단순한 한 마리 쥐가 아니다. 내가 목숨을 걸고 피하고 싶은, 내 두려움의 가장 완전하고 구체적인 현신인 것이다. 쥐는 신발의 앞부분만 갉아먹은 것이 아니다. 나의 달콤한 잠까지도 훔쳐 달아나버렸다. 정신은 또렷해졌고, 눈은 밝아졌다. 암흑에의 적응.

난 비밀 수사대원이라도 된 듯이 마지막 남은 용기를 동원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최대한 굽혀 발을 소파위에 올려놓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멀리까지 쳐다보는 것, 그것이 나의 첫 번째 탐색이다. 나는 하수도 삼거리의 중앙에 앉아 있다. 정면으로는 거친 시멘트벽이 커다랗게 둥근 곡선을 만들면서 기둥처럼 버티고 있고, 그것을 분기점으로 해서 두 갈래 길이 나 있다. 오른쪽 길은 왼쪽 길보다 조금 더 넓고 눈으로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 가운데 오른쪽으로 꺾은 길이 하나 더 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왼쪽 길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로 오른쪽 길에 비해 지면이 더 높아서 계속해서 졸졸 소리를 내며 가느다란 물줄기가 이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다행히도 그 물은 심하게 더러운 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면 세 갈래 길 중에 가장 드넓은 길이 펼쳐져 있다. 그 길의 끝에는 까만 어둠만 있어서 가보지 않고는 그 길이 어떻게 이어질 지 알 수 없다.

나는 온몸을 소파에 잔뜩 웅크린 채로 정면의 오른쪽 길을 응시하고 있다. 시야는 점점 밝아진다. 보려고 하면 더 보이게 되는 것인가. 처음에는 독방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제 밤거리 어딘가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수도는 생각보다 넓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바쁜 세상이다. 바퀴벌레들의. 눈이 밝아지자 사방의 벽과 바닥, 소파에서 통일성 있고 유동적인 시각적 자극이 탐지된다. 쉼 없이. 빠른 속도로. 그것들은 더듬이를 움직여대면서 가로로, 세로로, 이어지고 끊어지는 행렬을 만들어 움직이고 있다. 갑자기 배에서 요동치는 소리가 난다. 친숙한 소리. 배가, 고프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난다. 나의 비위를 건드리는 어떤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 것일지도. 혹은 쥐의 털에 묻어있던 바이러스가 위장 속으로 들어간 것일까.

뇌에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몸은 이미 소파에서 일어나 있다. 그 거대한 쥐와 수많은 바퀴벌레를 밟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해 돌이켜 설명할 방법은 없다. 나는 한쪽 구석에서 연거푸 토사물을 뱉어내고 있다. 그 근처에서 바퀴벌레들은 더 바쁘게 움직여댄다. 나는 무작정 걸었다. 소파에 앉은 채 굶어 죽은 시체가 쥐와 바퀴벌레들에게 뜯어 먹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른쪽 발목을 절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선택은 자동이었다. 삼거리 중앙에서 나는 어느 길로 가야할까 물어보지 않았다. 수많은 바퀴벌레들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나도 바퀴벌레처럼, 몸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어쩌면 정수리 어딘가에 간질간질 더듬이가 한 쌍 돋아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더듬이가 말해주는 방향을 좇았다.

내가 이 하수도로 떨어진 지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먹지 못한다면 정신을 잃게 되리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눈앞은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이렇게 계속 걸어가다가 나는 어느 순간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풀썩 쓰러질 것이고, 물이 고인 시멘트 바닥 위에서 살은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다. 쥐가 쥐로 보이지 않고, 바퀴벌레도 바퀴벌레로 보이지 않는다. 나도 그것들과 같은 존재는 아닐까. 혹은 내가 그것들을 먹어도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그것들이 나를 좀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방금 전, 어디쯤인지 모를 이 벽에서 ‘720’이라고 적힌 철제 표지를 발견했고, 내가 아직 숫자를 읽을 정도로 정상이라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기록을 마친 뒤 나는 내게도 아직은 주소 있는 곳에서 삶을 마칠 권리가 남아있다는 믿음과 함께, 이 근처의 마른 바닥을 찾아 누울 것이다. 쥐가 날 뜯어먹든 말든.


3. 눈을 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계속해서 내 이마에 떨어지고 있다. 멀찍이 졸졸 물소리가 난다. 새끼손가락을 스치고 무언가 지나간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순간적 절망. 여긴 하수도 어디쯤이다.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없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주일? 한 달?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아무런 메시지도 포함하지 않은 절규! 여기저기서 괴수들의 포효가 되돌아온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얼굴에 떨어진 물과 눈물이 섞여서 입속으로 들어온다. 짠맛에 문득 뭔가가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살아야겠다. 난 뭔가에 홀린 듯이 일어섰다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에 받아 냄새를 맡아본다. 눈으로 보기엔 깨끗하다.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는다. 세 방울 째. 눈물도 마른 채 꺽꺽 괴성을 내며 흐느낀다.

나의 마지막 계획. 다시 바닥에 눕기로 했다. 졸음과 피로가 쏟아진다. 내가 왜 맨홀에 빠졌냐고?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입가에 피식 미소가 떠오른다. 곤이와의 약속이라,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 같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 35년의 세월, 결국 썩은 내 나는 하수 속에 버려질, 날 괴롭히는 이 몸은 뭐고, 또 징그러울 정도로 또렷한 내 생각들의 정체는 뭔가. 어머니가 생각난다. 여동생 지현이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연구소의 동료들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몸은 점점 굳어가고, 오한이 온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 차가운 바닥에 다시 눕는 것은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잠에 빠지면, 난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두렵고, 외롭다. 저항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 나는 조심스럽게 눕기 시작한다.
오른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등을 천천히 눕히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바닥에 대기 전의 순간이다. 베개의 위치를 확인하듯 뒤를 잠깐 돌아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온몸의 피가 머리를 향해 역류한다. 멀찍이 한쪽 구석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살덩어리 위로 쥐 두 마리가 달라붙어 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모든 걸 본 것 같다. 죽은 새끼 고양이일 것이다. 나는 그 장면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래픽: 한혜영 기자 sweetdreamzz@snu.kr


시선이 닿는 끝머리에 불빛이 보인다. 나는 한 마리 굶주린 개. 눈에는 괴이한 형광 빛의 탐조등을 밝히고서 코끝으로 들어오는 모든 역겨운 냄새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불빛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그것은 하수도라는 세계의 등대 역할을 맡아 하고 있는 조그마한 조명등이었다.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불빛을 감싸고 있는 철제 마개를 더듬어본다. 미지근한 쇠붙이의 촉감. 어머니의 브로치. 아침 식탁의 포크.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내게 엄청난 배고픔을 환기시켜주었다. 난 다시 불빛 아래 주저앉았고, 내 앞에는 통조림 캔처럼 생긴 것이 버려져 있었다. 누가 거기에 가져다 놓은 듯이 똑바로 서 있는 통조림은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다. 캔을 두르고 있는 종이 라벨이 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인다. 황도. 내가 평소 좋아하지 않는, 술안주로 나와도 좀체 먹지 않는, 황도. 복숭아 향을 가장한 설탕물, 시럽에 절임을 당해 흐물흐물 해진 육질은 상상만 해도 비위를 거스른다. ‘그렇게 거만하게 거기에 앉아 있다고 해도, 난 너를 먹으려는 생각도 없으니까 그만 좀 약 올리시지?’ 황도는 대답이 없다. ‘네까짓 게 뭐냔 말이야, 맛도 없는 가짜 복숭아 같으니라고!’ 황도는 화난 기색도 없이 꿋꿋하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손 봐 줄까? 응?’ 난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서서는 오른발로 깡통을 힘껏 차버렸다. 오른쪽 발목에 통증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에 귀가 멍할 지경이다. 황도는 내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껍질만 남겨 놓은 채 어디론가 내뺐을 거라고 생각했던 황도가 통조림 안에 들어 있었고, 묵직한 캔은 멀찍이 날아가기는커녕 무거운 몸으로 근처에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쓰러져 있는 통조림 캔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것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썩은 쥐의 시체가 캔 안에 갇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젖은 흙으로 가득 찬 쓰레기일 뿐이거나. 이런 저런 두려움으로 불빛 아래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이것은 멀쩡한 황도 통조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발견. 이것은 원터치 캔이다!

나는 통조림의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셨다. 캔 뚜껑에 묻어있는 시럽까지도. 다시금. 나는 묻기 시작한다. 내가 대체 왜 이곳에서 내가 혐오했던 황도 통조림을 맛있게 먹고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왜 하필 나는 이 맨홀에 빠졌어야만 하는 거지? 대체 왜? 갑자기. 모든 것을 없던 일인 셈 칠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희망, 정신 나간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곳에 떨어진 건 아직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서 출구를 찾아서 나가기만 하면 택시를 타고 곤이와의 약속 장소로 갈 수 있다. 그래, 구조를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출구를 찾아보는 거다. 불빛이 있다는 건, 누군가 이곳으로 자주 들어와 점검을 한다는 것이고, 그 말은 출구가 가까이에 있다는 말일 테니.


4. 나는 화장실에 있다. 나는 더 밝은 불빛을 좇아 계속 헤맸고, 또 다른 불빛 앞에는 늘 황도 통조림이 있었다. 황도 통조림, 미로 같은 하수도, 멀리 있는 불빛, 다시 통조림. 출구는 없다. 헛된 희망을 좇는 사이, 내 뱃속은 황도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 발견한 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다. 벽 전체가 뒤로 물러나 있어 꽤 넓은 공간이 생겼고, 그것을 판자로 막아 화장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엔 작은 조명, 세면대, 그리고 변기가 있다! 하수도 안의 화장실. 7년 전 북경에 갔을 때, 자금성 안의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먹은 일이 있다. 하수도에서 황도 통조림을 먹고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자금성 안의 스타벅스에서 아침을 먹는 것만큼이나 색다른 경험이다. 출구를 찾아다니는 동안 내가 이 화장실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두 번째 왔을 때 난 소변을 보느라 변기의 뚜껑을 올려놓고 갔었다. 그런데 지금 변기의 뚜껑은 다시 내려와 있다! 분명, 이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이 화장실의 정체는 뭘까, 내가 먹은 황도의 정체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지도. 애초에 모든 것이 음모는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올드보이>도 그런 이야기 아닌가? 그 사람은 나를 하수도에 가둬 놓고 양육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하다. 난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당해야 할 만큼 악랄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싶다. 진심으로 간절히, 내가 그렇게 나쁘게만 살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다. 누군가 내게 그렇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다.


5. 나는 화장실 변기 위에서 깨어났고, 출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나는 나도 모르게 화장실에서 나와 맞은편 시멘트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의 통조림을 훔쳐 먹었고 누군가의 화장실을 훔쳐 썼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난 나를 구조해 줄 수도 있는 사람의 정체를 먼저 파악하려고 했다.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수도꼭지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변기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가느다란 물소리. 잠시 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지저분하고 헐렁헐렁한 무채색의 옷을 걸친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가버리려고 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렇게 놀란 눈치는 아니다.
“저…저는 며칠 전에 여기 빠졌거든요. 구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자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다. 두 사람이 눈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사이 침묵 속에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어색함을 못 이겨 말을 뱉어냈다.
“죄,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그만 허락도 없이 화장실을 썼네요.”
여자는 말을 더듬으면서 미안해하는 날 보면서 온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저는 여기서 나가야 하거든요. 여기에 떨어지면서 오른쪽 발목을 삐었어요.”
여자는 내가 그녀를 처음 불렀을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오른쪽 발목을 살펴본다.
“어디 한 번 봐요.”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고 했고, 나는 멈칫 하며 오른쪽 발을 뒤로 뺐다.
“걸을 수 있겠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절뚝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오른쪽, 왼쪽으로 몇 번인가 길을 꺾어 걸어가니 탁 트인 공간이 나왔고, 침대와 책상, 선반이 꽤 그럴듯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선반 위에는 반쯤 물이 차 있는 유리 물병과 컵, 접시, 크고 작은 돌멩이들, 육각형의 성냥갑, 커다란 반달 모양의 나무 빗이 놓여있다. 그녀는 나를 침대에 눕힌 후에 발목을 살펴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목이 심하게 부었어요. 얼마간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둬야 되요.”
침대에 누워서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빛났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야윈 턱과 목, 어깨선이 드러나 보였다. 젊은 목소리였지만 손은 거칠고 손등에는 주름이 많았다. 그녀는 선반 위의 물병에서 물을 따라 나에게 주었다. 나는 허겁지겁 마셨고, 그녀는 말없이 다시 컵에 가득 물을 따라 주었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나는 결국 염치도 없이 물병 안에 있던 물을 다 마셔버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책상 위의 촛불이 흔들린다. 초 옆에 놓여 있는 낮은 사기 그릇 안에서는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녀는 내 배 위에 손을 얹고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은은한 향 연기. 졸음이 쏟아진다.


6. 여전히 촛불이 가만히 어둠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어디론가 가고 없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득 든다. 벌떡 일어나 앉아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은 채, 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른쪽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나는 책상 위의 물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두꺼운 노트에는 스케치, 짧은 글들이 더러 보였다. 그 옆에는 하얀 가루가 담긴 커다란 병이 하나, 선인장 화분이 하나 놓여 있다. 책상 밑바닥에는 옷가지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고, 맨 위에는 동그란 방석이 그것들을 누르고 있다. 내가 그녀의 책상을 훑어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그녀가 돌아왔다. 커다란 신발을 질질 끌며 걸어 들어온 그녀는 물이 가득 찬 유리병을 책상위에 놓고는, 조용히 신발을 벗어 침대 밑에 놓으며 말했다.
“신발 잘 썼어요.”
“저기요. 전,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요. 제 말 이해 못 해요?”
“죄송해요. 발목을 다치셔서 당분간은 신발이 필요 없을 줄 알았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절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어디 있는지 아시죠? 절 출구 있는 곳으로 좀 데려다 주세요. 걷는 게 힘들긴 한데, 이젠 기어서도 잘 다녀요.”
그녀는 천천히 방석을 꺼내더니 그 위에 앉은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시면 되잖아요? 아저씨가 어디로 떨어졌는지는 저도 몰라요.”
“제가 떨어진 곳을 통해서는 다시 못 나가요. 저는 엄청 높은 데서 떨어졌다니까요. 맨홀 뚜껑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걸 모르고 그 위를 지나간 거죠. 아무튼 그곳으로는 다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아무튼, 아가씨는 그럼 출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여자는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고만 있다. 맙소사. 이 여자는 말로만 듣던 미친 여자겠지. 정상인 중에 이런 썩은 내 나는 하수도에 살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더 이상 이 여자에게 설명할 필요도, 도움을 요청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되도록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할 뿐이다. 바닥에 앉은 그녀를 위에서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녀의 머리카락이 기름지고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신발을 신고 아픔을 참으며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화장실이 있는 곳을 향해서.
“잠깐만요. 물 좀 더 드시고 가세요. 언제 또 드실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나는 뒤돌아서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분노와 의심이 섞인 그런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친절이 왜 그토록 혐오스러웠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 물은 어디서 떠 오신 겁니까? 하수도 밖에서 떠 왔으면서, 왜 나한테는 길을 안 가르쳐주는 거지? 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구조를! 여기서 나가야 된다니까!”
내 고함소리가 멀리서 다시 되돌아왔다. 너무 흥분해서인지 숨이 차오를 지경이다. 여자는 조용히 일어서서 선반에서 컵을 가져와 물을 따라주었다.
“물은 화장실에서 떠 온 거예요.”
나는 아무 표정도 없는 그녀가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서워졌다. 그녀가 건네준 물을 마시면서 마지막 한 방울을 마실 때까지 그녀의 눈을 노려보았고, 그녀는 무심히 날 바라보았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을 게요. 이건, 내가 여기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야. 내가 여기서 나가든 못 나가든 그것만은 알아야겠어. 난 여기 왜 떨어진 거지? 도대체 누가 이 따위 못된 짓을 하고 있느냔 말이야. 맨홀 뚜껑을 열어놓다니,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이게 다 누구 짓이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침대로 가서 앉았다.
“왜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하세요? 나는 내 발로 하수도로 걸어들어 왔어요. 여기에서 살기로 선택했으니까요. 난 구조대원을 기다리지도, 출구를 찾지도 않아요. 아저씨는 무슨 선택을 하셨는데요? 그리고 구조대원을 기다린다면서 왜 여기서 도망가려고 하는 거죠?”
“선택이라고? 난 그런 거 한 적 없어. 내가 처음부터 낱낱이 설명해볼 테니까 들어봐. 나한테는 곤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녀석한테는 민정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어. 둘이 사귄 지 벌써 3년은 됐을 거야. 어제 밤에, 아니 내가 맨홀에 빠지기 전날 밤 말이야. 민정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하늘에 맹세컨대 내가 먼저 전화한 건 아니야. 강남역으로 나오라고 해서, 갔어. 난 정말 민정이가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야. 어젯밤엔, 아, 아무 일도 없었어. 음, 내 말은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는 셈 칠 수 있다고.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맨홀에 빠진 날 밤, 곤이한테 전화가 왔어. 잔뜩 술에 취해 있더군. 나를 만나서 꼭 물어볼 게 있다고 했어. 난 곤이가 말한 술집으로 가려고 집을 나섰지.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술집이 있는 곳까지 밤길을 걸었어. 그러다가 망할 맨홀에 빠져버린 거야. 차라리 떨어지면서 죽었으면 깔끔할 뻔 했다고. 그놈의 소파만 없었더라면 그렇게 됐겠지. 그러니까, 난 하수도에서 황도 통조림이나 까먹으면서 미친 여자를 만나서 내 신세를 설명하겠다는 선택을 한 적이 없다고.”
“아저씨, 전 미치지 않았어요. 단지 하수도에서 사는 게 편해서 여기서 사는 것뿐이에요.”
“아, 그래요? 그건 미안하게 됐고. 그나저나 저도 아직 결혼 안 했거든요, 처음부터 아저씨라고 부르시니까 참 거슬리네요.”
그녀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결국 아저씨는 하수도에 숨어 있기로 선택하셨군요. 지금은 얼마나 더 숨어 있을까 고민하고 계시는 중이고. 아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곤이를 만났더라면 절대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곤이라는 분은 아저씨가 행방불명 돼서 아저씨를 걱정하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겠네요. 그러다보면 안 됐다는 마음에 아저씨를 용서할지도 모르죠.”
“아니, 아가씨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난 비겁하게 어디로 도망가려고 한 적도 없어. 그냥 사고였다고, 사고! 사고로 맨홀에 빠진 거고, 구조대원들은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빠져있을 거란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아가씨, 아가씨 무슨 사이비 종교 신도 아니야?”
“내가 보기엔, 아저씨가 사고로 여기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게 더 사이비 종교 같은데요. 사고였다고 말하면서 그 질문은 왜 하신 거예요? 여기에 왜 오게 되었는지, 누구의 음모인지 말이에요. 단순히 사고일 뿐인데,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어요?”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눈을 껌뻑거리며 한참 동안 신발 앞부분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선언하듯 덧붙였다.
“누구나 뭔가를 믿으면서 살아요. 아저씨는 우연을 믿고, 저는 필연을 믿을 뿐이에요.”
“그래, 어떻게 보면 내가 맨홀에 빠진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해. 곤이를 만나기가 정말 두려웠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아가씨는 여기서 사는 게 좋나? 왜 이렇게 비위생적이고 어두운 데서 살아?”
“여기도 좋은 점이 많아요. 절대적으로 좋은 곳은 없는 법이니까. 아저씨도 지내보면 아실 거예요. 그렇다고, 영원히 여기서 살 것도 아니고요. 아저씨도 아저씨 집이 최고로 좋은 건 아니잖아요. 제가 아저씨는 왜 아저씨 집에서 사느냐고 물으면 할 말 있겠어요?”
그녀는 갑자기 꺄르르 웃었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무안해졌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민정씨랑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 정말이야. 내가 그녀를 목 졸랐던 것 같기도 하고. 가끔씩 여기서 잠이 들 때마다 내 손목을 틀어잡으면서 창백한 얼굴로 캑캑 대던 얼굴이 생각나. 그러면 잠에서 깨지. 그녀는 잔뜩 취해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어.”
여자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사실 이곳에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의 커다랗고 새카만 두 눈에 공포가 가득 차올랐다.
“그, 그래서 아저씨가 민정씨를 주, 죽인 건가요? 그리고 여, 여기에 숨어 있는 거죠?”
숨이 가뿐지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난 숨은 게 아니라니까! 여기 떨어진 건 사고였다고, 사고! 정말이야. 난 겁쟁이가 아냐.”
난 나도 모르게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에 너무 오래 있었던 데다가, 발목을 다쳤는데 영양 섭취도 제대로 못 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괜찮아요?”
여자는 책상에 기대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으니까 울지 마세요. 아저씨는 얼굴에 착한 사람이라고 씌어 있어요. 뭔가 기억이 잘못 되었을 거예요. 일단은 발목도 그렇고, 아무 걱정 말고 여기서 푹 쉬세요.”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다시 눅눅한 그녀의 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편안했다.
“아저씨, 제 얘기도 들어보실래요? 저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를 많이 썼는데요, 등단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작년 겨울에 신춘문예에 여섯 번째 떨어지고 나서는 암담했어요. 한동안 글이 한 자도 써지지 않았는데, 어느 날 뉴욕의 하수도에 사는 부랑자들 얘기를 티비에서 보게 됐어요. 그래서 황도 통조림을 싸들고 여기로 들어왔죠. 혹시 저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같이 지낼 수 있게 통조림 바닥에 여기까지 오는 길을 그려놨어요. 참, 아저씨가 여기 왜 떨어지게 됐냐고요? 저를 만나려고 그런 거예요. 아저씨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죠. 아저씨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성냥갑을 가져다가 꺼져 있던 향에 불을 피웠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고, 낮은 목소리는 꿈속에서처럼 아련하게 들려왔다.


7. 어렸을 적 목욕탕 바닥에 수건을 깔아 놓고 잠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멀찍이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섞여 들리던 물소리. 반쯤은 깨어 있고, 반쯤은 잠이 든, 나른한 포근함.
“아저씨, 일어나서 이것 좀 드세요.”
여자는 황도가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내 곁에 앉아 있다. 오랜만에 맛본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나는 얌전한 아이처럼 군말 없이 접시를 받아들었다. 숟가락으로 황도를 반으로 자르는 순간, 유리 접시에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린다.
“저기, 내가 잠들기 전에 이상한 얘기를 좀 한 것 같아. 그땐 갑자기 내가 못된 짓을 저지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 잊어버려 줘.”
“아저씨, 저도 그럴 때가 가끔 있어요. 내가 사실은 악마처럼 사악한 사람인 건 아닐까?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뭔가가 두려울 때가 있어요. 처음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곧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그런 면이 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황도를 씹었다. 복숭아의 달짝지근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복숭아의 질감을 음미했다.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
“아저씨, 이제 발목에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아요. 일어나서 걸어보실래요?”
“내가 몇 시간이나 자고 있었던 거지?”
“나흘을 꼬박 주무시던데요. 긴장이 풀리면서 의식을 잃으셨던 건지도 몰라요.”
나는 손을 들어 수염을 만져보았다. 수염은 말끔하게 면도되어 있었다.
“아가씨, 저,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여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침대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자, 이제 걸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절 따라오세요. 제가 길을 안내해드릴게요. 나흘을 꼬박 소파를 찾아 다녔어요. 아저씨가 떨어지셨다던 곳 말이에요.”
“이봐요, 아가씨! 내가 떨어졌던 곳으로 가서 뭘 하자는 거지? 거기에 가 봤자 빠져나갈 수 없다니까! 우린 입구가 아니라 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그녀는 내 말엔 아랑곳 않고 책상 서랍에서 손전등을 꺼내들고는 아무 말 없이 가버렸고, 나는 별 수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어둠 속에,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하수도가 뻗어 있다. 이따금 작은 조명등이 나타나고, 또 갈림길이 나타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쳐다보면서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적막 속에 커다란 신발이 맨발을 따라가고 있다. 몇 시간을 걸었을까. 멀리 세 갈래로 나뉘는 익숙한 삼거리가 보인다. 한가운데에는 소파가 이쪽을 등지고 앉아있다. 그녀는 소파로 다가가더니 소파를 뒤집어엎었다. 소파는 다시 벌을 서게 되었고, 그녀가 소파의 엉덩이 부분에 올라서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손을 위로 뻗어 올리더니 힘줘서 뭔가를 밀어 올렸다. 그르렁, 묵직한 쇠가 아스팔트 바닥을 긁는 소리. 맨홀 뚜껑이 열렸다. 엄청난 자동차 소음과 경적 소리가 한꺼번에 섞여 들어왔다. 난 한동안 할 말을 잃고서 다시 바닥으로 내려오는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그렇게 낮을 리가 없는데.”
“처음에 떨어졌을 땐 어둠에 적응이 안 돼서 그랬을 거예요. 자, 조심히 올라가세요. 키가 크시니까 양팔로 버티면 올라갈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밖은 해가 저물어가는 때인 듯하다. 퇴근 시간쯤일지도 모르겠다. 맨홀 밖에서부터 세차게 바람이 불어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나는 소파의 엉덩이로 올라섰다. 양팔을 뻗으니 차갑고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바깥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쌩하고, 도시 소음에 귀는 멍하다. 그녀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가씨 말이 맞는 것 같아.”
여자는 말없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처음 보았던 그 표정 그대로.
“사실, 몰래 노트에서 시를 읽었어. 아가씨가 쓴 시, 아가씨한테 직접 들어보고 싶어. 그런 다음 떠나도 괜찮아.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 시를 들려줄 수 있지? 자, 내 신발 신어.”
여자는 해맑게 미소 지었고, 우리는 말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큰 신발과 맨발이 나란히. 아참! 그러고 보니 맨홀 뚜껑 덮는 걸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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