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손혜영 기자 rewjie@snu.kr

피니싱 터치양소연


그의 작업실은 한쪽 벽면이 엄청나게 큰 창문으로 덮여 있는 독특한 곳이었다. 아니, 단지 그곳이 그의 작업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에게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처음 그곳에 들어서던 순간 고전 영화에서 나오는 오래된 발레 연습실을 떠올렸다. 틈새에 곰팡이가 조금씩 앉은 빛바랜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거대한 거울. 역시 똑같은 금빛 창틀이 늙은 오후의 햇살을 조각조각 부숴대고 있는 휑하게 넓은 방. 구석에는 누군가의 발레 슈즈에서 떨어져 나온 리본이나 레이스가 조금 널브러져 있는 그런 곳. 그의 작업실은 그런 느낌에 더해 약간의 쨍한 파란색 시럽을 타놓은 듯했다. 그가 그녀를 처음 작업실로 데려왔던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어때?”

마치 자기만 아는 곳에 숨겨 놓은 보물을 소녀에게 내미는 소년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방은 그 자체로 그였다. 창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살은 그의 눈빛이었고, 차가운 바닥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는 그의 목소리였으며, 한 줄로 질서 있게 늘어서 있는 대신 제멋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세워진 이젤과 그 앞의 크고 작은 붓들은, 그의 심장이었다. 그녀가 조용히 서있자 그는 초조해하며 서둘러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좀 더운가? 미안, 에어컨이 없어서.”

그의 분주한 손길이 창문을 열자 바람 대신 태양이 반짝거리며 창틀을 넘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는 태양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마법 같은 기분을 경계로 이전과는 다른 삶이 될 순 없을까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는 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마법 같아.”

그는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그 말을 각인시키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팔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처럼.”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더없이 유치한 이런 말을 듣고 웃는 대신 전율하고 있는 자신이 한편으론 민망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디자인스쿨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이런 식으로 손을 잡아 주고, 얼마든지 더 유치해도 괜찮으니 그 어떤 말로든 그녀를 좋아한다고 전해주기를 얼마나 수없이 상상해 왔던가. 그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싶었다. 시야에 그가 나타나면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떤 일에 있어서든 늘 자신을 믿는 견고함, 상대를 감동하게 만드는 배려와 디자인스쿨보다 맞은편 경영대학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냉철한 명민함. 궁극적으로 그녀는 그를 닮고 싶었다. 아니, 그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 것조차도 그녀는 믿기가 힘들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이젤 위의 반쯤 그려진 그림 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그림을 만지는 것은 그의 영혼에 손을 대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반대쪽 손으로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맥박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쳤다. 왼손에는 자신의 심장을, 오른손에는 그의 영혼을 잡은 채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림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덜 마른 물감으로 촉촉했다. 물에 젖은 그의 영혼은 그녀의 손끝에서 찢어져 버릴 것처럼 위태롭고 연약했다. 그가 그녀를 이젤 앞에 앉혔다.

“그려 줘, 나머지를.”

그녀는 머뭇거렸다.

“알잖아, 졸업한 뒤로 난 사진만 찍었어. 붓을 어떻게 잡는 건지도 기억 안 나.”

“알아, 그래도 그려 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무슨 말이야?”

“아틀리에 곧 정리하게 될 거야.”

“왜?”

그는 말없이 다른 이젤 앞에 놓인 의자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대학 시절부터 그를 알아오면서 이제껏 한 번도 그가 그런 식으로 힘없이 앉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치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다. 그들 앞에 놓인 두 이젤 사이의 거리가, 그녀가 임의대로 침범해서는 안 될 무거운 영역처럼 느껴져 그녀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보이지 않았고, 고개는 숙여져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태양이 하나씩 결정을 이루어 얼음 조각으로 변해 사방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분명 그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왜?’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의 목소리가 방 안의 얼음 조각들에 부딪혀 끝없이 메아리치고 있음을 느꼈다. 왜, 왜일까. 그토록 견고하다 생각했던 그의 이런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는 답을 듣지 못한 같은 질문을 속으로 한없이 반복했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이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임 끝에 그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갑자기 그가 큰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놀란 그녀는 머뭇머뭇 그의 어깨와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간간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가 과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인지. 그녀는 궁금했다. 알 수 없는 그의 슬픔에 가슴 한 구석이 쓰리면서도 동시에 그의 이런 약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벅차서 그녀는 그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몰래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미안, 미안. 내가 지금 무슨 바보 같은 짓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줘.”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신우야, 작업실에 데려와 준 거, 나를 믿는다는 뜻 아니야?”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 내가 그림을 수입하고 있던 화가 올슨이 죽었어. 문제는,”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계약된 대로 그의 연작을 다 공급하지 못하면 내가 갤러리에 보상을 해야 하는데, 아틀리에 정리해도 불가능할 정도야.”

그녀가 그의 손에서 담뱃갑을 가져와 한 개비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그는 다시 불을 붙였다. 그녀가 저쪽 이젤의 의자를 끌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난 신문사에서 편집장 비위에 맞는 사진 갖다 바치는 것만 하고 살아서 그런 화랑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네 잘못도 아닌데, 뭔가 방법이 있지 않아? 변호사라도 구해야 하는 거 아냐?”

“갔었어, 로펌에 상담 하러. 그런데 계약이 이렇게 된 경우에는 내가 그의 그림을 어떻게든 구해다 주는 수밖에 없어. 아니면 무조건 위약금을 내거나.”

“올슨이 죽기 전에 그려 놓고 아직 너한테 넘기지 않은 건?”

“… 그는 약속한 날에도 그림을 완성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창틀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창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창문이 삐걱거리며 내는 금속성의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괜찮아, 유진아. 너한테 이런 얘기해서 미안. 넌 그냥 잊어버려. 어차피 방법이 없어. 그가 살아나서 마저 그려주거나 위작을 만들어서 갖다 주지 않는 한, 그냥 아틀리에 팔고 집 좀 줄이고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아, 되게 쪽팔린다, 이런 얘기. 너처럼 직장 잡고 살았어야 했나.”

“하자.”

“응?”

“방법이 있는 거네. 위작 만들어. 네가 그리는 거야.”

그녀는 자기 입에서 나오고 있는 말에 스스로 놀랐다. 또 이러고 있다. 십년 쯤 전 이진우에게 대뜸 ‘그럼 우리가 직접 가면 되잖아요. 제가 들어갈게요, 혜광전자.’ 라고 말했던 그 순간과 똑같다. 또 무모한 용기가, 쓸데없는 의욕이 밀려들고 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유난히 조용한 침묵과 함께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 한다면… 기법을 흉내 내는 건 쉬워. 서로 알다시피 나나 너나 학교 다닐 때부터 카피는 완벽했잖아. 하지만… ”

그는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옳고 그른 걸 떠나서, 올슨의 그림은 나는 그릴 수 없어. 터치는 따라할 수 있지만, 그가 다음에 뭘 그리려 했을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아.”

“그럼 내가 할게.”

제가 들어갈게요, 혜광전자.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의 떨림도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와 달리 사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이런 멍청한 욕구. 뭐든지, 뭐든지. 네 꿈을 이루고 너의 맘을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해 줄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내가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무리 위험한 미친 짓도.

“내가 할 수 있을 거야. 오래 안 그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내 그림체 숨기기도 좋을지 몰라. 우선 그 화가 그림들을 보여 줘.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피니싱 터치만 하는 거야.”

“유진아.”

“나 법학 때려 치웠을 때 법 지키는 것도 집어 치운 거 몰라? 아니, 뭐, 그전부터 집시법을 밥 먹듯 어기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자, 신우야.”

그렇게 해서 그녀는 그의 작업실을 매일 같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들은 몇 번 씩이나 작업실에서 함께 밤을 새며 올슨의 터치를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며 밑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대개 늦게 출근하여 오후에 기자들의 취재에 동행하거나 영상피처 코너를 위한 기사거리를 찾아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녔지만 신문사가 기사를 마감하는 밤 열시까지는 새로운 요구가 들어오는 일이 많아 좁은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쉴 틈 없이 다급한 키보드 소리가 울리는 정치부 기자실과 거의 이젤만 한 크기의 모니터가 수십 대 놓인 디자인실 사이를 기웃거리며 회사에 붙어있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작업실로 오면 열한시 사십 분쯤이 되었고 그들은 그림들을 펼쳐 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두 시쯤 커피메이커에 물을 올렸다. 부글부글 따뜻한 소리와 함께 끓어오르는 커피를 보고 있으면 그녀는 그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녀는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투명한 주전자 속으로 가늘게 떨어져 내리는 어둡고 뜨거운 액체는 오래전 학생회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밤을 샐 때 마셨던 캔 커피보다 더 늙고 지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 양 커피포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진기자 일은 아무리 해도 어딘가 낯설었다. 그것은 분명 사양 산업이었다. 헤럴드 트리뷴은 아예 사진기자들의 몰락을 기사화한 적도 있다. 그녀는 그 기사를 남 일 보듯 무덤덤하게 읽은 뒤 잘라서 냉장고에 붙여두었다. 그 기사에 딸린 유난히 커다랗게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술로서의 사진은 죽었다. 이제는 대중이 너무 쉽게 사진을 찍는다. 화이트밸런스나 셔터스피드를 조정할 줄 아는 것은 생계를 보장해 줄 특별한 능력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토 저널리즘이 진짜 저널리즘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같이 일하는 기자들은 사진에 의미를 담는 것을 믿지 않는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이 그저 줌링 몇 번 돌리고 셔터를 누르면 끝인 줄 안다. 그녀는 기자들의 은근한 무시를 늘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일을 가장 피곤하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또한, 예술로서의 사진은 또 어떤가. 그녀가 사진기자를 택한 것은 과거에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였기도 했지만 그보다 예술가가 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도피였으며,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강신우처럼 다른 많은 디자인스쿨 동기들도 그녀가 사진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직장 잡고 산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들 또한 그녀와의 사이에 은근한 간격을 두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경계인이었다. 예술인과 생활인 사이, 기술자와 대중 사이, 객관적 서술 속에서도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저널리스트와 있는 그대로를 찍어내는 기계 사이의 어딘가에 그녀는 서있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그리고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일을 하러 무거운 DSLR카메라에 거대한 망원렌즈를 물리고 묵직한 플래시를 달아 들고 나갈 때면 그녀는 그 무게 때문에 그것을 곧잘 오른쪽 어깨에 의지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흡사 총을 메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렌즈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상상을 한다. 대통령을 향해서, 당 대표를 향해서, 네번째 출마한 선거에서 또 떨어진 구청장 후보를 향해서, 그녀의 프레임 안에 침입해 피사체를 가리는 기자들의 머리를 향해서.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때나, 그의 작업실로 향할 때 스트랩 끝에 매달려 그녀를 따라오는 카메라는 마치 주인을 따라 산책하는 강아지 같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쓰다듬으며 묻곤 한다. 이진우가 내 인생을 망쳐버린 걸까?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법대를 그만 두고 몇 년을 멍하니 보내다 디자인스쿨로 도망치듯 유학 가 버리는 대신, 노동운동을 계속하고, 언젠가 정권이 바뀌면 고시를 보고, 그렇게 살았을까? 그게 좋은 삶인가? 아니면, 사실은 법보다 몇 배는 나를 설레게 하는 사진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계기를 준 은인이라고 해야 할까? 카메라는 이제 제발 좀 이진우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라고 말한다. 전혀 다른 삶을 택했는데도, 이진우에 대한 기억은 철로 영상을 새겨 넣은 필름 같아서 아무리 오랜 시간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도 좀처럼 마모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걸음을 빨리 해 그의 작업실 열쇠를 돌리고, 두 시에 커피를 끓이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학생회의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책상 아래로 살며시 손을 잡던 이진우. 독약처럼 쓰고, 결국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겨져 버려져야 하는 캔 커피. 그녀는 이제 둘 뿐인 작업실에서 그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기댔다. 모종의 불안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위작을 만들고 있다는 도덕적 가책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발레 연습실 같은 그의 작업실 창문이 깊고 투명한 검은색에서 인디고, 네이비 블루, 코발트 블루로 변해 갔다. 그녀는 그의 곁에서 보는 창틀 뒤의 그 하늘이 액자에 담긴 그림 같다고 느꼈다. 언젠가 그를 잃게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진우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를 잃을까봐 두려웠다.

오 년 전, 신우는 이란의 시위 현장에 사진을 찍으러 가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직업상 가야 하는 것은 그녀였지만 그녀가 일하는 신문사는 해외에 사진 기자를 파견하지 않고 외신이나 연합뉴스에서 사진을 얻어 왔다. 그녀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결국 정치부 기사를 제일 많이 맡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이란의 반정부 시위가 사람들이 희생한 만큼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올까? 정의를 꿈꾸는 사람들은 상처 입는 대신 보람과 환희를 느낄 수 있을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저 가끔 그녀의 카메라로 정치인들을 쏴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네가 그걸 진심으로 지지해? 그냥 별거 아닌 정의감이나 모험심에서 가려는 거라면 가지마. 그 일 하는 도중에, 예를 들면, 네가 찍어 놓은 사진 메이저 신문사 기자들이 가로채 가고, 뭐, 그런 식으로 배신을 당하고, 또, 넌 프리랜서니까 프레스로 인정받지도 못할 텐데 그럼 또 회의감이 들 거고, 그런 일들이 있어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가치가 아니면, 가지마. 너만 상처받을 거야.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야, 네가 있든 없든. 사람들은 다른 기자의 사진을 볼 거야.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대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언론사에 길이 남을 사진을 찍어오는 사람은 널렸을 거야. 길바닥엔 부서진 카메라 조각이 수도 없이 흩어져 있을 거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빨라졌으며 눈시울은 붉어졌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너 혼자 아무리 힘들게 부서지도록 노력해도 아무런 가치도 없어. 결국 한 사람이 더 애쓴다고 해도 권력을, 힘을 넘어서서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이끄는 데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 내가, 내가 그렇게 해봤으니까 내 말을 믿어, 신우야. 가지마. 나처럼 비참해지지마.”

그녀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까지 신우를 말렸던 것은 십여 년 전 그 날 때문이었다. 그녀는 서대문경찰서 앞 대로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다. 마치 지구의 회전이 느껴져 어지러워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이전까지 그런 식으로 끌려갔을 때면 그녀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말들을 듣고, 어떤 말들을 하고, 어떤 장면을 보았는지, 또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는지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 정도의 일을 겪었다고 해서 장마철의 비가 쏟아지는 새벽마다 악몽에 시달리게 만드는 트라우마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일에 지배당할 만큼 약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무언가를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잊어야 한다는 사실을 되뇌느라 몇 번이고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곤 한다. 그날 그녀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그 생각에 압도되고 말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자유롭게 걷고 있음에도 눈앞에서는 조금 전까지 시야를 채우던 좁은 방의 광경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입에 올렸던 이름, 이진우. 아니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남자가 했던 말을 자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공중전화를 향해 다가갔다. 확인해, 그는 아니라고 말할 거야. 확인하면 돼. 그녀는 쓰러지듯 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뻗었지만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손은 수화기를 타고 미끄러질 뿐이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거기 들어있던 동전은 이미 어디론가 빠져버리고 없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진우를 찾으러 가거나 전화를 하러 집으로 갈 시간은 없었다. 당장 확인하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는 남자의 말은 점점 더 증폭되어 그녀의 뇌를 집어 삼킬 것 같았다. 그녀는 공중전화에서 나와 무작정 지나가던 사십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전화를…”

그는 순간 화들짝 놀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닿았던 양복 소매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더니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또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그는 그녀를 부축해 공중전화 박스로 다시 데려가 동전을 넣어 주었다. 그녀가 간신히 고맙다고 말하자 그는 돌아서면서 대답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세상은 바뀔 때가 되면 알아서 바뀔 테니.”

알아서 바뀐다고? 글쎄. 그녀는 지금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겨우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고 신호가 가기까지의 공백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공교롭게도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이진우의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가 말한 것은 여보세요가 다였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수화기를 들고 서 있는 게 더 이상 힘들지가 않았다. 그녀의 내부 어디선가 매우 비논리적인 에너지가 생성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난 뒤라 해도, 하루 종일 집회에서 구호를 내지르고 최루탄을 피해 달려 다닌 뒤라 해도, 그녀는 피곤하지 않았다. 기운이 났다.

“정말이에요?”

고작 그 다섯 글자만을 말했을 뿐인데 그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것은 침묵 그 이상의 불편함이었다.

“정말이에요, 선배?”

그녀는 항상 그를 선배라고 불렀다. 다른 여자 동기들처럼 그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지가 않았다.

“… 미안하다고 말할 염치도 없다.”

지금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왜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되묻지 않는 걸까. 그녀는 수화기를 더 꽉 붙잡았다. 선배가 지금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게 분명해. 지금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 그녀는 생각이 흐려졌다.

“선배…선배가 나 넘겨줬어요? 선배가 나 혜광전자에 있다고, 그게 신유진이라고, 그랬어요?”

“유진아, 나도…”

그녀는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럴 수도 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인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나잖아요. 선배,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는데, 지금 이거 선배랑 나잖아요. 빨리 아니라고 해요.”

“유진아.”

“…”

“유진아, 우리 이제 보지 말자. 내가 너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놈인지 생각날 거 같아. 안 그래도 우리 사귀는 것 때문에 학생회 일하기 불편한 적 많았잖아. 다른 사람들도 우리 신경 쓰여 했고. 아무튼 이번 일은 미안하다, 정말.”

모든 게 멈춰버린 듯 했다. 만일 사실이라고 한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도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그저 다시 머리가 멍하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쓰러질 것 같아 전화박스의 왼쪽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진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간단히 전화로 얘기할 일이냐고, 이게 그저 이름 석 자 불러준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그 결과로 내가 무슨 일을 당했을지 뻔히 알면서 괜찮으냐고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는 게 내가 알던 이진우냐고,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녀는 그 생각들을 문자로 조합해 그에게 물을 힘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도, 이렇게 전화로 이제 보지 말자 따위로 정리할 수 있는 거냐고. 그건 차치하더라도, 이 년 남짓 같이 학생회 일을 했던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게, 이진우냐고. 그래놓고 이제 우리가 헤어지니 학생회 일하기가 더 편해질 거라고? 너는 도대체 학생운동을, 노동운동을, 할 마음이 있기는 한 거냐고. 네가 진심으로 이 일을 대한다면 그럴 수 있냐고.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이든 내뱉게 되면 그게 너무나 어리석거나 유치한 말이 될까봐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해버린 말조차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훗날 후회했지만, 그 순간의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전화를 끊지도, 화를 내거나 다른 걸 더 묻지도 않고 멍하니 네라고 대답한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기는 좀 전의 사십대 남자가 넣어둔 동전을 토해냈다. 그 남자는 바로 이 건물 앞을 비틀거리며 지나는, 피를 묻히고 있는 젊은 여자가 전화로 긴긴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동전을 너무 많이 넣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이진우는 할 이야기가 그만큼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수많은 영상이 스쳐 지났다. 이상하게도 그 장면들은 이진우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도 그녀 자신에 대한 것들이었다. 대자보를 만들다가 학생회실의 커다란 탁자 위에서 맞은 수많은 새벽들. 그때의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 무거운 몸의 느낌. 대동제 때 외치던 구호. 최루탄. 달리기, 달리기, 달리기.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휴학 신청서에 이름을 쓰던 떨리는 손. 신유진의 마지막 받침 ㄴ은 너무 작아서 거의 알아볼 수도 없었지.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어두워서 앞도 잘 안 보일 지경이고, 작은 불빛이 있는 곳이면 어둠보다 더 빽빽하게 들어찬 먼지가 가득한 공장의 날들. 절대 들키지 않게 잘 숨겨두었다가 가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 때 살짝 꺼내보던 학생증. 그리고 주문처럼 되뇌고 다녔던 전태일의 말,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 조합에 가입해 달라고 설득하는 일보다 더 어려웠던, 조합을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부탁. 그리고…. 그녀는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간 느끼던 체한 듯한 감정을 그녀는 이진우와의 통화 후에 겨우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나가고 싶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너무도 예쁜 교정이 그리웠다. 그녀가 늘 앉던 도서관 구석의 창문을 마주보는 그 자리에 앉고 싶었다. 공장 일에 서투른 그녀를 바보 취급하는 작업반장에게 나 A대생이야 이 새끼야 소리 지르고 싶었다. 조합 일 때문에 사장에게 불려가 협박을 당할 때마다 아, 그래, 제발 좀 해고해라 말하고 싶었다. 이 일이 이런 식으로 해서 잘 될까, 내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나 회의가 아니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집에 가서 이틀쯤 깨지 않고 잠을 자고 싶었다.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물리적으로 그 공장에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간 그저 버텨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진우가 그녀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를 포기한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 안에서 무너진 것은 로맨스가 아닌 겨우 지켜오던 이상과 신념이었다. 그녀는 전화박스의 붉은색 바닥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는 마지막 그림에 색을 입히고 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14호 붓이 앞뒤로 리듬을 타듯 천천히 둥근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 위로 가을의 금빛 햇살이 부서졌다. 느슨하게 반쯤 묶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형광등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온통 황금빛이 흘러넘쳤다. 벽에 걸린 오래된 시계에서 나는 소리와 그녀가 간간히 붓을 물에 담그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그녀 옆의 팔레트는 이미 수십 가지의 물감이 번져 서로 뒤엉켜 그 자체로 하나의 추상화처럼 보였다. 그녀는 14호 붓을 소리 나지 않게 천천히 내려놓고 가장 가는 붓으로 그림의 터치가 좀 더 올슨의 것처럼 보이도록 다듬기 시작했다.

‘피니싱 터치가 위조를 더 정교하게 하기 위한 작업이 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 없이 혼자 작업실에 있을 때마다 느끼던 불편함이 이내 그녀를 엄습했다.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파란 물감을 조금 찍어 전혀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은 곳에 한 번 덧칠을 했다. 그리고 이젤 앞에서 물러나 한쪽 벽에 쭉 세워진 그림들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황금빛 햇살이었으나 분명 방 안에는 청록색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문의 자물쇠가 삐걱거리며 열쇠를 삼키더니 그가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고갯짓으로 늘어선 그림들을 가리켰다. 그림은 네 점. 그가 마지막으로 화랑에 보내야 하는 그 수 만큼이었다. 올슨의 마지막 연작.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그녀의 불안을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 없어졌어. 우리, 만약,”

그가 그녀 옆으로 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만약 발각되면? 그림을 납품한 건 나야. 그쪽에선 내 이름 밖에 몰라. 네가 그렸다는 건 나 밖에 모르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래 전 이진우의 목소리였다. 해고당하는 걸로 끝난다면 상관없지만 우리가 대학생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더더욱 경찰이 알게 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야. 하지만 우리 학생회 사람들 밖에 모르는 사실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우리가 서로 지켜주면 돼.

…지킨다?

사람이 사람을?

글쎄, 그녀는 이제 그런 것은 믿지 않았다.

이진우와 그 통화를 한 다음 날, 그녀는 결국 힘에 굴복하고 만 것 같다는 굴욕감과 배신을 당한 자가 으레 느끼는 허탈감, 그만두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붙들고 있었던 것을 마침내 놓을 수 있게 된 해방감을 느끼며 책을 한 권씩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닳아버린 표지들, 맑스와 엥겔스의 늙은 얼굴들, 서울법대에서 발행한 자유의 종, 그녀가 공감하여 느낌표를 그려둔 페이지들이 어두운 상자 안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세 권쯤 집어넣다가 문득 그녀는 박노해의 이름이 적힌 그 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엔, 그만두었다. 새삼스런 자각이 총알처럼 가슴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표지에 그려진 남자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뻗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으로부터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 안에 가득 찬 공허를 토해내고 싶어 연달아 기침을 했다. 그러나 애를 쓸수록 폐포 하나하나에, 혈구 하나하나에 그 공허가 더욱더 깊이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남은 노동해방문학 몇 권을 계속해서 상자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책장에 당당하게 꽂혀 있던 운동과 전혀 관계없는 법학 전공 서적들도 모조리 상자 속으로 쓸어 담았다. 커다란 상자는 이제 비좁아져 닫히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를 억지로 눌러 닫고 커다란 테이프를 꺼내 상자를 봉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상자의 뚜껑은 계속해서 다시 올라 왔고 그녀는 자꾸만 테이프를 엉뚱한 곳에 붙였다. 마치 상자 속에 갇히게 된 책들이 숨을 쉬려고, 햇빛 속으로 나오려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물이 상자 위로 툭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테이프를 뜯고 있던 그녀는 결국 크게 소리를 내어 울며 상자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테이프로 상자를 붙이려 하고 있었다. 겨우 입구를 대충 막고 테이프를 끊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가위도 칼도 없이 손가락으로 테이프를 비틀고만 있었다. 테이프는 점점 엉망으로 꼬이고 구겨질 뿐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동그란 테이프 뭉치가 끝에서 대롱거리는 그 상자를 껴안고 지칠 때까지 울었다. 방 안에는 책들의 장례식을 지켜보는 차가운 공기 분자들이 맴돌았다.

다음 날 그녀는 학교에 나가 학생회실 문을 조용히 열고 아무런 설명 없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문이 열리자 바로 그녀를 발견한 것은 하필이면 이진우였다. 개자식. 그녀는 겨우 그 세 글자를 참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한 마디만 하고 문으로 향하기로 했다.

“후배들 주세요.”

그녀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긴장한 탓인지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가, 학생회실과는. 이진우와도. 그리고 다음 순간, 무얼 더 생각할 새도 없이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문을 벌컥 열고 되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 네가 내 머릿속에 살아. 네가 내 머릿속에 산다고. 노동운동?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니라 네 생각이었을 거라는 의심이 들 때마다 난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 이제 내 머리에서 나가, 꺼져버려.”

89학번 후배들이 그녀의 정신 나간 폭언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했다. 이진우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녀는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할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헛소리를 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학생회실을 뛰쳐나오기에 바빴을 뿐이다.

오전 내내 내린 비로 백양로는 미끄럽고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달리면서 가방 속을 손으로 휘저어 보았지만 우산이 잡히지 않았다. 비는 쏟아 붓지는 않았으나 안개처럼 몰래, 서서히 옷 속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어째서 하필 그런 말이 튀어나온 것인지 의아했다. 그녀가 휴학을 하고 공장에 갈 정도로까지 이 일에 헌신적이었던 것은 오로지 이진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분명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진우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진정한 가치였다면, 그녀가 온전히 스스로 택하고 믿은 가치였다면 아무리 그동안 힘들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그만두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결국 진심으로 믿지도 않는 것, 하나의 허상을 위해 싸워왔단 것인가. 단지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고, 또 좋아하는 사람에게 세뇌 당해서? 그게 정말 진실인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학교 정문을 나왔고, 미끄러운 아스팔트 때문에 횡단보도 앞에서 한 번 휘청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으며, 두 번 다시 그 초록색 교정에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그녀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전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면 담담하게 이들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인지 순간 헷갈렸다. 이것은 예전의 그것처럼 그녀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가치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강신우가 형량을 줄여 보기 위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는 말은 세상에서 그녀가 절대 견딜 수 없는 단 하나의 말이었기에 그녀는 경찰이 더 많은 말을 하기 전에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따라갔다. 그녀의 발끝에 걸린 제이드 그린 물감병이 바닥에 놓여있던 그녀의 사진 작품 위로 쓰러졌다. 그 마지막 터치는 사진을 온통 잿빛 녹색으로 뒤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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