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손혜영 기자 rewjie@snu.kr

『인셉션』의 인식론·사회론·주체론김도민


1. 현실보다 리얼한 영화

계획 신도시 일산의 어느 영화관에서 『인셉션』을 보았다. 복잡한 서사구성과 장엄한 음악, 화려한 스펙터클에 흠뻑 빠졌다. 이번의 영화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려는 노력이 끝나기도 전에 영화는 2시간을 훌쩍 넘어 끝나버렸다. 마지막의 팽이는 돌았는지 넘어졌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영화는 꺼져버렸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해질녘 신도시를 걸었다. 계획도시의 정렬된 모습이 흡사 영화 속 천재 설계가인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진 역)가 만들어놓은 미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만들고 싶은 건물을 내 마음껏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홀로 즐거운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걷는 이 도시가 현실인지 꿈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일까. 올여름의 대흥행작 『인셉션』의 평은 대부분 꿈과 현실의 혼재라는 지점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영화가 분명 꿈이라는 소재를 다루었고 꿈이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는 논리 하에서 서사를 펼쳤기 때문에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의 토템인 팽이가 돌아가는 도중에 살짝 흔들리다가 영화가 끝나버렸기 때문에 코브가 미션을 성공하고 현실에 돌아온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라는 장자지몽(莊子之夢)의 고사성어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복잡한 층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꿈과 현실의 구별이라는 인식론적 문제는 인식하는 사람이 딛고 서 있는 사회현실이라는 문제를 필연적으로 제기하며, 현실은 인간의 선택에 따라 변화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주체론의 영역까지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인셉션』에는 사회적 은유가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꿈을 꾸고,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고, 누군가에게 어떤 생각을 심는다는 등의 주요 서사는, 단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감독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꿈속의 꿈’이라는 감독의 상상력은 몇년 전 세계를 강타한 서브프라임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파생상품의 논리와 매우 닮아 있다. 각본을 직접 쓰는 크리스토퍼 놀런(Christopher Nolan) 감독의 서사가 현실세계의 어떤 ‘리얼한’ 부분과 맞닿아 있는지, 인식론·사회론·주체론이라는 세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탐사해보고자 한다. 그래야만 복잡한 서사를 재구성하는 발품을 마다하지 않고 대중이 열광한 이유를 밝힐 수 있으리라.

2. 인식론

1) 인과론의 재구성

사랑한다. 어느 날 불현듯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당신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사랑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별개의 시공간이 된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사랑이 왜 필연적인가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우연한 사건들은 모두 현재의 사랑을 위한 ‘예비작업’이 된다. 과거의 모든 일상적 사건들은 사랑이라는 현재의 사건을 낳은 특별한 사건으로 채색된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사건이 발생한 후에야 허겁지겁 그 원인을 소급하여 찾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사유논리인 ‘사후(事後)적 재구성’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적 상태는 자신만의 고유한 시간성과 인과성이 존재하며 그것을 사후성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후성이란 과거의 경험과 인상, 기억들이 이후의 어떤 심리적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이전의 것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들은 한번 발생하면 그 자체로 불변하는 사실이 되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발생한 다른 사건에 따라 언제든지 재구성되어 새로운 의미로 바뀔 수 있는 ‘유동하는 사실’인 것이다.1) 사랑의 재구성처럼.

놀런 감독은 이런 인간의 사유논리를 영화에 구현한다. 결말의 사건이 영화 첫 장면에서 먼저 제시된다.2) 감독의 첫 영화 『미행』(Following, 1998)은, 살인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담당형사와 마주앉은 작가 지망생 빌(제레미 데오발드 분)의 회상적 설명으로 시작된다. 즉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자수한 빌이 자신의 미행동기와 사건발생시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보여준다. 좀 더 명확하게 사건의 발생을 직접 첫 장면에 드러낸 영화는 2000년 작품인 『메멘토』(Memento)다. 영화는 단기기억 상실증자 레나드 쉘비(가이 피어스 분)의 살인장면으로 시작하여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과정을 역(逆)시간순으로 파편적으로 재구성해준다. 이렇게 놀런의 영화는 대부분 결말에서 시작한다. 이는 『인셉션』에서도 동일하다. 림보(limbus)에 빠진 사이토(와타나메 켄 분)를 찾아간 코브는 림보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권유하며 자신을 총으로 쏘아 꿈에서 깨어나려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후의 영화전개는 림보 속에서의 사이토와의 만남이 발생하기까지의 전과정의 재구성이다.

어떤 원인이 발생하고 그후 결과가 펼쳐진다는 단선적 인과론에 우리는 익숙하기 때문에, 놀런의 영화들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를 한번 더 보아야 비로소 첫 장면이 결말 직전의 장면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감독은 손쉬운 시간적 인과론이 아니라 사후적 재구성이라는 역시간적 구성을 고집하는 것일까. 단순히 극적 호기심을 높이기 위한 영화적 기법에 불과한 것일까. 시간적 선후에 따라 사건발생을 이해하는 우리의 ‘과학적’ 인식론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적이며 현실적이라 믿어온 순차적·인과론적 인식의 프레임보다, 역시간적 인식 프레임이 현실을 좀더 ‘리얼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감독은 강조하는 듯하다. 여하튼 사건이 발생하고 그후에야 원인이 재구성된다는, 즉 ‘사후성’이라는 인간의 리얼한 사유논리를 감독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

2) 꿈과 현실은 어긋나 있다

사이토는 자신의 집에 괴한에게 잡혀 있다. 누군가의 발길질에 방바닥을 나뒹군다. 이때 방바닥에 깔린 인조섬유 재질이 현실 속 자기 집의 모직물과 다르다는 사실에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협박하는 코브 팀에게 조소를 날린다. 설계자가 마음대로 꿈을 조작할 수 있지만 그 ‘꿈나라’ 작품은 최대한 현실과 동일해야만 한다. 즉 꿈이 최대한 디테일하게 현실과 같아야만 협박으로 타인의 생각을 훔칠 수 있다. 이처럼 꿈과 현실은 동일하게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영화 설정 덕분에(?) 관객들 대다수는 현재의 장면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 혼란스러움에 매혹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진중권은 응축과 전이에 따라 작동하는 프로이트의 꿈이론을 꺼내들며 꿈의 세계는 “비논리적”인 반면에 “의식, 혹은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인과관계”라고 설명하면서, 영화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뒤섞어놓아 “영화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인셉션에 나오는 꿈의 세계는 너무나 논리적”이며 “꿈의 세계마저 거의 현실과 같은 논리로 구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혹평한다.3)

물론 꿈과 현실의 작동논리가 다르다는 것은 황당한 꿈을 자주 꾸어본 우리들에게도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영화가 설정한 시대에는, 타자와 꿈을 공유하고 그 꿈에서 누군가의 정보를 캐내려는 임무를 수행하고, 누구나 꿈의 침입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누군가의 생각을 훔쳐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꿈이 꿈이 아니게끔’ 조작하는 기술이다. 따라서 당연히 꿈은 최대한 현실과 동일하게 설계되어야 할 뿐 아니라 현실의 법칙을 따른다는 감독의 상상력은 ‘영화적 설득력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다!

현실과 꿈의 문법이 각기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감독의 서사가 얼마나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갔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관객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자. 이보다 현실과 꿈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꿈을 아무리 현실과 동일하게 만들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꿈과 현실은 어긋나 있다는 사실이다.

“감각과 죽음이 현실에서 꿈 쪽으로는 관철되지만 그 역은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 속 현실과 꿈을 정반대로 뒤집어 읽을 필요를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꿈속에서의 죽음은 상징적 죽음을 의미하며 그것이 아무리 잔혹하다 하더라도 우리를 꿈에서 깨우는 역할을 하지만 현실에서의 죽음은 육체적 죽음만이 아니라 꿈 자체를 꾸지 못하게 할 것이다”4) (강조: 인용자, 이하 동일)

영화평론가 이창우의 날카로운 분석처럼, 아무리 꿈을 현실처럼 아니 현실보다 더 멋지게 제작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죽으면 이미 그 꿈 자체는 성립 불가능하다. 즉 현실과 꿈은 경계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긋나 있다. 꿈은 현실이라는 사회론을 주춧돌로 삼아야만 세워질 수 있는 건축물일 뿐이다.

2.사회론

1) 꿈 중독

“엄마는 오지 않았다. 너무도 배가 고파 목이 터져라 울었지만 아빠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6시간, 또 어떤 날은 12시간을 꼬박 굶었다. 그러나 비정한 부모는 생후 3개월 된 딸을 외면했다. 굶주림에 지치고 지친 아기는 서서히 말라가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 한 부부가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자신들의 갓난아기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아기를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 엄마와 아빠가 모두 인터넷게임에 중독돼 아기를 돌보지 않은 것이다. 이들 부부는 하루에 최소 6시간에서 12시간까지 피씨방에서 살았다.”5)

우리는 꿈속에서 현실을 경험한다. 꿈속에서 꿈을 꿈이라 생각지 못한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꿈을 꿀 수는 없다. 운수 좋은 날은 자신의 잠재욕망이 건축한 꿈속에서 은밀한 쾌락을 즐기지만 때로는 악몽으로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 만약 꿈을 마음대로 건축할 수 있다면? 그곳에 에덴동산을 만들어 뛰놀 수 있다면 이보다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코브가 약효의 효과를 확인하러 간 어두컴컴한 지하층에는 ‘달콤한 꿈’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섬뜩한 장면이 펼쳐진다. 음침한 곳에 편하게 누워, 그들만을 위해 설계된 유토피아에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쾌락을 40시간씩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 “왜 이런 짓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깨어나기 위해서 여기 오며, 이미 그들에게 꿈이 현실이 되어버렸다고 ‘드림(dream)방’ 관리자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다.

이러한 영화적 스토리를 두고 현실과 꿈의 혼재라는 장자지몽 식으로 안일하게 해석하는 것은, 꿈꾸러 온 사람들은 모두 현실세상에서 배제된 자들이라는 ‘리얼한’ 현실을 빠뜨릴 위험이 있다. 드림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현실에서 즐길 수 없는 것들을 약을 통해 꿈속에서 실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같은 꿈 중독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이버 중독자’와 너무도 닮아 있지 않은가. 어둑한 지하 피씨방의 가상세계에서 펼쳐지는 가상캐릭터의 향연에 빠져 결국 현실의 진짜 자식마저 죽게 만들었던 (앞서 인용한) 최근의 참혹한 사건이나 피씨방 돌연사 등과 영화는 매우 흡사한 시공간이다. 현실에서 배제된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드림방’을 찾는 ‘꿈 중독자’와, 자신의 소중한 아바타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 온라인 유토피아를 구현해주는 ‘피씨방’을 찾는 ‘온라인 중독자’들. 이들 모두는 유토피아행 ‘차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차표구매’의 열망을 자양분 삼아 자본은 부쩍부쩍 성장한다.

2) 함께 꿈꾸다

마약처럼 꿈에 중독된다는 스토리보다 더 놀라운 상상력은 함께 꿈꿀 수 있다는 설정이 아닐까? 놀런은 “프라이버시만 없다면 사람들과 의미있게 교감할 수 있는, 수많은 또다른 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6) 며, 영화에서 함께 꿈꾼다는 것은 중요한 장치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은밀한 혼자만의 꿈을 넘어 누군가와 함께 꿈꾼다는 놀라운 상상력. 즉 혼자서만 꿈에 들어가버리면 현실의 아내는 불행해지기 때문에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꿈, 함께 꿈꾸는 기술을 코브는 개발해낸 것이다.

영화에서, 경쟁회사의 오너가 곧 죽어 아들 상속시 의도적으로 그 회사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쪼개게끔, 상속인의 생각을 바꾸어주기를 사이토는 제안한다. 물론 여기에 합류하는 팀원들은 제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코브는 자식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거물의 힘이 필요했고, 아리아드네는 불법행위일 뿐 아니라 코브의 아내라는 불청객이 언제 튀어나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 설계라는 신기술에 매혹되어 팀에 참여한다.7) 코브와 아리아드네는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애정과 개인적 호기심 때문에 팀에 참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개인적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 외부의 존재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다. 자본은 언제나 개인의 호기심과 가족적 애정을 자본축적의 도구로서 활용해왔다. 따라서 이들 모두 궁극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종속된 것이고 이들이 함께 꿈꾸는 것은 기업가(자본)의 유토피아를 위해 함께 꿈꾸는 것이다.

이처럼 ‘꿈 중독’과 ‘함께 꿈꾼다’라는 영화적 서사는 사회학적으로 해석의 폭을 넓혀보면 좀더 풍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꿈 중독이 됐든 집단의 꿈이 됐든 기본적으로 현실과 꿈 모두에서 작동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다. 그러나 ‘꿈 중독’과 자본에 포섭된 ‘집단의 꿈’을 넘어서는 좀 더 ‘리얼한’ 놀런의 놀라운 상상력이 하나 더 있다. 21세기형 최첨단의 자본주의 현실을 드러내는 유사한 구조에 대한 은유, 즉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림보’라는 연쇄구조다.

3)‘꿈속의 꿈’이라는 파생상품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가 금융위기에 빠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금융위기도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향이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지지도 않았다. (···) 이미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번 위기는 (···) 전세계의 경제까지 뒤흔들었다.”8)

21세기의 첫 금융위기인 서브프라임 사태는 전세계를 강타했다. 여기에 한국도 만만치 않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새로운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은 흔히 증권화를 통한 파생상품에서 찾아진다.

“미국경제의 정체와 위기의 원인은 느슨한 대출기준과 매우 괴상한 금융상품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늘고 있다. 특히 한 사업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몇가지 대출을 하나로 묶어서 증권화하는 사업이다. 그 금융상품이 비난받는 이유는 대출 채무불이행이 발생해도 채권을 조성한 쪽과 손실을 부담하는 쪽의 사이가 차단되기 때문이다”9)

이처럼 증권화라는 ‘도깨비 방망이’는 새로운 파생상품을 연쇄적으로 만들었고, 이는 서브프라임이라는 낮은 신용등급의 대출상품을, 높은 신용등급의 금융상품으로 뒤바꾸는 ‘마술상자’였다. 결국 돈이 부족함에도 집을 사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과 불안한 자본금을 안정한 자산으로 뒤바꾸려는 금융기관의 욕망이 결합하여 파생상품이라는 새로운 금융기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 파생상품의 형성과정은 영화 속 꿈속의 꿈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흡사하다. 서브프라임이란 신용대출자의 신용도가 낮은 등급을 말한다. 따라서 대출(모기지)회사가 주택을 담보로 하여 대출하는데 낮은 신용등급자에게 높은 이율로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이다. 이렇게 주택담보대출회사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모기지를 상품으로 하여 다시 금융회사에 판매한다. 금융회사는 다시 파생상품을 만들어 자금 확보를 위해 헤지펀드나 기타 금융기관에 판매한다. 이렇게 주택이라는 현물은 파생상품이 되어 다시 판매된다. 마치 현실에서 꿈을 꾸다가 다시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듯이. 이렇게 파생상품이라는 꿈속의 꿈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논리 그 자체다.

사실 21세기형 증권화기법이 낳은 파생상품 이전에도, 이미 ‘화폐’의 탄생은 꿈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현실세계의 모든 물건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다. 생활에 필요한 무수한 사용가치를 동시에 확보할 수 없는 인간사회는 다른 상품과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떤 상품이 교환가치로 활용되기 시작하다가, 결정적으로 교환가치만을 가지는 즉 사용가치가 사라진 물건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화폐다. 그렇다고 화폐가 단번에 교환가치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본위제가 시행되던 시기까지는 여전히 화폐는 금이라는 사용가치를 담보할 때라야 교환가치의 대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가 ‘금본위제’에서 화폐인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튼우즈체제’로 넘어가면서, 화폐는 사용가치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렇게 화폐는 모든 사용가치를 집어삼켜 원하는 사용가치를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만능열쇠’가 되어버린다. 이제 모든 인간의 욕망은 돈이라는 물신, 즉 사용가치라는 현실적 용도를 넘어 교환가치라는 돈만을 무한 욕망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화폐로서 실현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화폐물신주의를 주장한 맑스와 꿈해석을 역설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유사한 면이 많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꾸어왔고 과거에 꿈은 미래를 예언하는 도구였다. 고대 왕의 꿈은 미래의 국가운명을 예견하는 어떤 미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런 꿈의 논리를 역전시킨다. 외려 과거의 욕망의 현실화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제 꿈은 미래와의 연계가 아니라 과거의 실현되지 못한 욕망의 드러남이고, 반복적으로 악몽을 꾸는 신경증자의 외침은 이처럼 현실의 금기를 벗어나고픈 억압된 욕망의 발현으로 해석되기 시작한다. 이는 마치 미래에 사용될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교환하던 ‘현재-미래’의 축에서, 화폐만을 지니면 자신의 모든 욕망은 이미 실현되어버리는 ‘과거-현재’의 축으로 변화한 것과 동일한 논리구조다.

어쩌면 『인셉션』의 꿈논리와 최첨단 금융기법인 파생상품의 유사성은 근대 자본주의와 꿈해석의 구조적 유사성의 새로운 버전이 아닐까. 코브는 꿈속에 들어가 다시 꿈을 꾼다. 그 꿈은 다시 또다른 꿈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중의 꿈속에서는 기억주입(인셉션)이라는 목표 달성에 필요한 시간을 몇 곱절 확보할 수 있다. 맨 처음 코브가 이중의 꿈이라는 기술을 발명한 것은, 현실보다 오랜 시간 아내와 사랑하며 원하는 빌딩도 마음껏 소유할 수 있는 시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자본가가 자신의 부족한 자본을 채우기 위해 파생상품의 파생상품을 연달아 만들듯이.

꿈속의 꿈속의 꿈을 만들어 인셉션을 시도하다가 자칫 원초적이고 무한한 무의식의 밑바닥이라는 림보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영화적 상상력은, 서브프라임 위기에 따른 기업파산과 유사하다. 어떠한 무한한 욕망을 꿈꾸며 꿈속의 꿈으로 들어가지만 자칫 그것은 무한한 무의식의 ‘나락(奈落)’에 갇히는 상태가 림보다. 림보라는 정지상태는 마치 과도한 파생상품의 결과 야기된 세계경제위기인 서브프라임사태와 너무도 닮아 있다. 현실의 주택가격을 벗어나 무한증식하는 파생상품은 어쩌면 언제나 림보라는 서브프라임사태에 따른 모라토리엄(국가파산)의 사태를 예언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파생상품에 의한 2000년대 이후의 최대·최초의 경제위기를 감독은 꿈이라는 은유로서 보여주려 했다고 말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영화에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신호인 킥을 무시하면 현실세계에 돌아올 기회를 놓쳐버려 림보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는 마치 파생상품이 내보내는 여러 위험신호들을 제때 조절하여 통제해주지 않으면 기업이 파산하는 것과 동일하다. 현실로 돌아오라는 신호의 음악제목 “아니요, 난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처럼, 꿈속에서 계속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며 유혹하는 욕망에게,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이상 후회는 없어요”라며 현실로 과감하게 돌아오는 선택을 해야만 림보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마치 끊임없는 파생상품을 통한 자본축적의 유혹에서 어느 순간 들리는 위험신호를 적극 감지하고 현실의 상태를 점검하는 기업가만이 현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경제위기를 감지하는 것은 주체가 과감하게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는 선택을 할 때라야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주체라는 영역에 도착했다.

4. 주체론

1) 토템이라는 선택의 기준

“토템(totem): 미개 사회에서,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혈연관계가 있다고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특정한 동식물 또는 자연물.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집단의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토테미즘(totemism): 토템을 숭배하는 사회 체제 및 종교 형태. 심리적으로는 특정한 토템과 각 집단이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의례적으로는 토템에 대한 외경이나 금기로 표현되며, 사회적으로는 집단의 성원을 통합하는 힘이 되는 동시에 외혼제를 발생하기도 한다.”10)

영화의 설정이 꿈을 최대한 현실과 유사하게 설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현실과 꿈은 구별이 어렵다. 혼란에 대비해서 꿈에 들어가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꿈과 현실을 구별하기 위한 토템이라는 자신만의 도구를 반드시 챙겨야 한다. 자신마저 속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화적 기능 외에 토템은 주체론의 측면에서 보면 흥미로운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토템은 표준국어대사전의 뜻 그대로 원시사회에서 공동체를 상징하는 동물이나 식물이다. 즉 이런 물신을 중심으로 집단이 하나로 뭉친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발생한 토테미즘은, 숭배하는 동식물에 대한 외경이나 금기를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특히 외혼제처럼 근친상간 금지라는 ‘욕망의 금지’가 토테미즘의 중요 기능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금지하는 도구로서의 ‘토템’은 영화에서 사용된 의미와 매우 유사하다. 꿈의 유토피아에서 무한한 욕망을 즐기고자 하지만, 스스로 만든 토템이 언제나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템을 기준으로 어느 순간 현실로 돌아와야 림보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즐길 수 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해주는 토템은 적당한 욕망의 향유를 가능케 하는 인류의 발명품인 것이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자신만의 어떤 토템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것은 종교이거나 신념이거나 사상일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토템처럼 어떤 나름의 기준점을 가지고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상이한 토템을 숭배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주체의 선택이란 자신만의 토템에 따른 ‘신화’적 결정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주체는 결정을 홀로 내리지 못하는 의존적 존재이자 토템을 물신화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생명체라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2) 당신의 선택은?

림보라는 상태는 꿈과 자본주의가 언제나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영화소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림보는 어쩌면 ‘상징계’라는 현실세계에 언제든지 침투하려는 ‘실재’일 수 있다.11) 물론 진중권이 언급했듯이12) “매트릭스 속에 불현듯 침입하는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실재”로서의 아내가 실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구조물을 무한히 구축하다보면 결국 “영원한 꿈의 연옥(limbus)”에 빠진다는 점에서 ‘나락’이라는 위험의 상존이 실재 개념에 더 가까운 듯 보인다. 여기서 라깡의 정신분석 개념에 ‘아내’와 ‘림보’ 중 어느 것이 더 들어맞는가의 논쟁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내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림보라는 무의식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코브라는 주체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내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면 꿈속의 아내를 죽이는, 즉 자신의 죄의식을 이겨내야만 한다. 또한 림보라는 실재의 침입에도 자살이라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현실로 돌아갈 통로는 남아 있다.

코브는 사이토를 데리고 가야만 아들과 딸을 만나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인셉션이 거의 완수된 시점에서 림보에 빠진 사이토를 찾아간다.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영화는 다시 첫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무의식의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가에 쓰러진 코브를 어떤 경호원이 늙은 사이토에게 데려가고, 그는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코브의 팽이를 돌린다. 이때 토템이 계속 돌아가는 것을 보고 꿈속임을 깨달은 코브는 현실로 돌아가자고 사이토에게 이야기하며 자신을 향해 총을 쏜다. 그렇게 깨어난 코브는 모든 미션을 성공리에 마쳤고 안전하게 공항보안검색대를 통과한 후 고향집 거실에 앉는다. 과연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스스로 의문을 느끼던 코브는 토템을 돌려 현실여부를 확인하려 한다. 토템은 돌다가 약간 흔들리는 도중에 영화가 끝나버린다.

이를 두고 무한논쟁이 진행 중이다. 실제 총으로 자신을 쏜 후 미션이 성공하여 현실에 돌아왔고 특히 그렇게 꿈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아들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그 토템의 흔들림은 바로 토템이 넘어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곧 현실이라는 주장. 반면 토템은 명백히 넘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또다른 꿈에 불과하다는 반대론도 만만찮다. 그러나 여기서 코브의 마지막 귀향과 자식과의 만남이 꿈이냐 현실이냐는 정작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코브라는 주체의 선택이다. 코브는 평상시 같으면 토템이 넘어지는지를 확실하게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자식들의 얼굴에 행복해한 나머지 토템이라는 확실한 준거를 스스로 거부했다. 즉 코브라는 주체는 이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상관없다는 또다른 ‘선택’을 내린 것이다.

5. 복잡한 인간에 대한 흥미진진한 탐사

영화는 코브의 현실확인 ‘거부’라는 선택으로 끝이 났다. 사랑스러운 자식들의 모습에 ‘토템’은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꿈 설계를 개발하고 꿈 논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성적’인 코브조차 이성적으로만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엔딩장면은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던 상투적 기법에 불과하다는 비판13)과 달리, 인간적인 코브의 모습이 드러난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이러한 인간의 복잡성은 코브가 아내에게 주입한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라는 인셉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코브는 꿈속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아내를 설득하려고 아내의 머릿속에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주입(인셉션)한다. 결국 아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코브와 함께 동반자살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일단 어떤 생각이 머리에 자리잡으면 생각을 뿌리째 뽑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코브가 영화 초반부에 언급했듯이 가장 까다로운 것은 기생충이나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아니라 ‘아이디어’다. 아내의 머릿속에 심어진 ‘현실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현실에 돌아온 그녀에게 이곳도 현실이 아니라는 혼란을 낳았고 결국 현실에서 다시 진짜 자살을 선택하게 만든다. 어떤 목적을 위해 생각을 주입하더라도 그 인간이 주입자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잉여’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불확정성 법칙’을 따르는 복잡한 존재다.

자칫 어렵고 지루해지는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탐사를, 놀런은 흥미진지하게 구성할 줄 아는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다. 또한 『인셉션』은 인간의 인식론과 사회론 그리고 주체론이 얽히고설킨 인간탐사에 관한 잘 짜여진 텍스트인 것이다. 다만 인간에 대한 풍부한 서사적 ‘은유’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주체성이 전작들에 비해 소홀히 취급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코브의 심리는 가볍게 처리된 듯하며 팀원으로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물론 스펙터클과 굵은 서사에 집중하여 박진감 넘치는 영상을 창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행하는 작가지망생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선한 행동이 낳은 불행에 대한 ‘배트맨’의 복잡한 고민, 기억의 파편을 연결하기 위한 단기기억상실증자의 몸부림이라는 전작들처럼,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좀 더 자세했다면 『인셉션』의 ‘주체론’이 더 풍부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살아숨쉬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놀런의 인간탐구가 계속되길 기대한다.각주

1) 김상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창비, 2003, 180면 참조.

2) 물론 최종결말이 아니라 결말 직전의 사건을 보여준 후, 첫 장면 이후의 짧은 결말이 영화 마지막에 배치된다. 최종결말은 아니더라도 영화의 중요한 사건을 먼저 보여주고 그것을 역추적하는 구성방식은 사후적 재구성의 논리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진중권, 「<인셉션>의 철학」,『씨네21』, 2010년 8월 27일.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2085)

4) 『문화과학』 2010년 가을호, 239~40면.

5) 「게임중독 부모 때문에…3개월된 아기 배곯다 숨져」, 『한겨레신문』, 2010년 3월 4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08073.html)

6) 뉴욕타임스 인터뷰; 「꿈속에서 꿈을 훈련하라」, 『한겨레21』(2010년 8월 6일, 제822호)에서 재인용

7) 아서(조셉 고든-레빗 분)와 이미스(톰 하디 분)의 팀 참여 이유는 명시적으로 영화에 제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에 코볼사에 고용됐던 것으로 보아 모두 돈벌이를 목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8) 브루스 E. 헨더슨, 조지아 가이스, 『서브크라임 크라이시스』, 김정환 옮김, 랜덤하우스, 2008, 10면.

9) 같은 책, 73면.

10)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검색결과.

11) “라깡에게 실재는 순수차이를 은폐함으로써 상징계로 하여금 조화로운 전체가 되는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상징계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 실재란 인간의 사유가 상징계를 매개로 현실을 구성한 후에도 항상 자투리로 남아, 구성된 그 현실을 위태롭게 만드는 낯선 현실이고, 대상 a는 이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현하는 효소이다”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3, 72~73면. 이러한 홍준기의 설명처럼, 실재는 현실이라는 상징계를 통합하여 조화롭게 엮어주는 누빔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역할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지닌다. 여기서 림보는 상징계를 파괴하는 ‘낯선 현실’이라는 후자적 의미의 실재다.

12) 진중권, 앞의 글.

13)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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