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게 살 권리 박탈당한 채
죽음이 유일한 선택이 된 국민들
‘살기 위한 죽음’이 고발하는 현실을
국가는 외면하지 말아야

편집장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보다는 낫다는 뜻이다. 하지만 요즘의 상황에 비춰보면 문득 의문이 생긴다. 식생활의 변화로,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은 갈수록 늘어난다는데 주위 상황은 그렇지 못하고, 경제 성장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됐다는데 죽음을 택하는 사람은 늘어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쌍용자동차 무급휴직자 임모씨가 지난해 투신한 아내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복직을 기다리던 그는 끝내 복직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해고되지도, 복직되지도 못한 그가 남긴 것은 4만원의 통장 잔고와 150만원의 카드빚, 그리고 두 아이뿐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몇 년은 유난히 다사다난했다. 자신이 살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망루에 올라야했다. 어떤 이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 보장을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 10월에는 구미에서 한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했다. 뒤이어 11월에는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농성 중 분신을 시도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폭력 진압을 막기 위해서 몸에 불을 붙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재능 많던 한 시나리오 작가는 굶주림과 병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설을 앞두고 생계를 비관한 모녀가 동반자살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아무도 죽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 앞에서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없는 의문이 생긴다. 통장 잔고가 4만원인 무급휴직자가, 엄마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별 일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였다면 임씨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망상일까. 박종태 열사로 죽는 것보다 평범한 노동자 박종태씨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추측일까. 모녀가 함께 차에서 연탄을 피우기보다 같이 설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바람일까. 이들의 죽음의 책임을 국가에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다운 생활은 고사하고 생존의 권리라도 보장해야 할 정부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동안 국민에게 남은 것은 죽을 자유, 죽을 권리뿐이다. 이 시대의 국민들은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살인자에게 내려진 사형처분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는 시대에, 다만 살고자 했던 죄없는 국민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임씨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부산에서는 또다른 쌍용차 해고자가 목숨을 끊었다. 연이은 ‘생계형 죽음’은 우리의 현실이 ‘개똥밭’만 못함을 반증한다. 세상이 살기 힘들면 생계형 범죄가 늘어난다는데, 생계를 위한 ‘죽음’이 늘어나는 지금의 상황은 ‘살기 힘들다’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벅차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서고 GDP가 1조 달러를 기록한 지금, 우리는 아무도 손잡아주지 않는 개똥밭에서 하루하루 목숨걸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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