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았던 첫 컴퓨터 게임은 코에이에서 만든 삼국지 2였다.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중원 제패의 꿈을 키우곤 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어렵게 느껴지던 삼국지가 게임을 통해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다. 여포는 무력이 100이라 천하무적이지만 지력이 낮아 계략에 잘 걸린다. 무력이 99인 관우에 비해 93인 하후돈은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싸우는 녀석이다. 지력 98인 주유도 똑똑하긴 하지만 100인 공명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임의 정보들은 수많은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길잡이가 됐고 이를 통해 그들을 더 쉽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유비는 그다지 인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능력치가 고루 높은 조조에 비해 매력만 100일뿐 다른 능력치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더 훌륭한 조조가 주인공이 아님이 의아하게만 여겨졌다. 그 후로도 삼국지를 읽으며 유비가 추구했던 대의,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패권보다 민중의 삶을 더 우선했던 그의 정치적 노선을 인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중국인들이 유비를 사랑했던 이유가 숫자로 드러나지 않음은 먼 훗날에야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유비는 그저 무능력하고 찌질한 인물일 뿐이었다.

내년부터 국립 서울대에는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대학의 운영, 즉 대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들도 많이 달라진다. 이제 유사한 지향점과 관점을 공유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여러 다양한 학문들의 가치와 성과를 측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따라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미래를 장악한다. 회계장부의 숫자로 파악되는 우리의 현재는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하는, 이윤과 무관한 학문을 추구하는 존재들은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채 숫자에 의해 호명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적자를 냄으로써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요소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는 노력은 실용성과 상관없이 아름다우며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은 외국 논문 등재 횟수와 상관없이 소중하다.

진리가 강의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교과서가 말해주지 않는 진리들에 헌신했으며 그 진리들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거꾸로 우리들은 강의실 안의 진리를 찾아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시장의 원리와 대학의 원리가 다르다고 믿는다면, 진리가 이윤으로 표현되지 않으며 학문의 무게를 화폐로 잴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학문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할지 대학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미래가 확정되기까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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