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국문학과)
지난 연말 대학문학상이 일간지에 오르내린 바 있소. 이변이라는 것. 툰드라에도 꽃이 피었으니 조금은 놀란 척할 수 있다고 여겼음일까. 이 놀란 척엔 나름의 곡절이 숨어 있어 보이오. 분초를 다투는 학문의 세분화 속에서 생존 그 자체가 필사적이니까. 대학문학상이 점점 초라해져 숨통이 끊어질 지경에 이른 것은 불문가지. 그런데 지난 연말의 이변이란 무엇일까. 그동안 이 나라 학문이 모방에서 벗어나 어느 수준에 이른 것일까. 위대한 학문이란 논리이자 동시에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에 관악산도 이제야 눈뜨기 시작했다고 보면 어떠할까. 상상력이 불모였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면 이젠 창조적 미학에로 향하기에 또 다른 혹독함이 대기하고 있는 형국.

이런 거창한 망상을 두고 자기 논에 물 대기란 빈축을 살지도 모르겠소. 그렇지만 변명이 아주 없을 수는 없소. 『대학신문』은 피난지 부산에서 탄생했소. 창간사에서 밝혔듯 범대학(凡大學)의 공기(公器)였소. 창간 3주년을 맞아 서울대학신문으로 확정됐지만 한동안 문예면은 개방적이었소. 대학신문상(1956)이 문단을 향한 첫걸음의 시험대로 학생들의 글쓰기를 부추겼소. 논리일변도의 선진국 학문 앞에 몸둘 바 몰라하던 세대의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그 몸부림의 3가지 형태를 조금 말해보고 싶소.

이인성씨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1974 소설당선작)를 보시라. 제목부터 일종의 패악이라고나 할까. 갈 데 없는 비논리의 극치오. 정신분열증의 내력을 가진 집안의 주인공이 그를 부정한 세상과 맞서 몸부림치는 행위란 견고한 서구 논리로 구축된 학문에 맞서는 몸부림이 아니었던가. 두 번째로 김영란씨의 소설 「문」(1975). 교지 「서울대」 창간호에 실린 이 작품의 서두엔 릴케의 시가 걸려 있소. 그대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한 소녀를 놓고 ‘나’와 겨루고 있는 녀석에 대한 열등의식에 시달리는 이 자의식이란 또 무엇인가. 이상의 「날개」와 김승옥의 「환상수첩」에 젖줄을 대고 있지만 동시에 릴케의 시선이 요망됐소. 그것은 이 나라 언어의 자기표현의 가능성 탐색으로 볼 것이오. 셋째의 사례는 송호근씨의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구조」(1978)이오. 이청준과 하우저를 나란히 세워두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분석한 이 평론의 그다움은 유연성에서 왔소. 평론도 읽힐 수 있는 글쓰기임을 진작부터 자각한 것.

놀라운 것은 이들 3인행의 지속성. 송씨는 최근 이렇게 썼소. “위대한 작가가 아니더라도 혼망한 삶의 갈피를 잡아주는 작가들, 사회적 풍화작용에 닳는 실존의 허망한 소멸과 싸우는 괜찮은 작가들과 이 시대를 동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중앙일보」 2011. 2. 13)라고. 송씨의 미학이 지닌 지속성의 아름다움을 보시라. 전공의 논리를 안고서도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음이란 지속성이 아니고는 어림없는 일. 이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반구대의 조각을 다룬 근작 「돌부림」(2006)을 보시라. 출발점의 그 몸부림의 자세가 여기까지 흔들림 없이 뻗어있지 않겠소. 김씨의 경우는 예외일까. 천만에라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오. 김씨의 지속성이란 그러니까 법체계의 엄격한 논리성에 맞서며 한밤중에 쓴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 그것은 명문이 아닐 수 없다는 것. 대법관에 이르는 길이 거기 빛나고 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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