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과 재개발을 앞둔 청계천 탐험하기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지난 달 27일(수), 세운상가 앞에서 만난 예닐곱의 사람들은 간단한 인사 후 곧바로 상가 앞에 널려있는 짐꾸러미 사이를 비집고 골목에 들어선다. 점심 찬거리를 들고 빗속을 뛰어가는 식당 아주머니가 눈에 띈다. 여기저기 귓전을 울리는 전기톱 소리를 따라 골목을 굽이 들어간다.

‘문화연대’, ‘플라잉시티’, ‘도시건축네트워크’와 시민은 지난 7월부터 청계천 탐험을 시작했다. 탐험대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모토를 내걸고 현재 진행 중인 복원 공사 기간에 맞춰 결성됐다. 그러나 탐험대의 시선은 복원 이후까지 뻗어 있다. 복원 공사는 2005년께 완료되지만, 그 후 ‘재개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는 아직 재개발에 대한 공식 발표는 없으나, 청계천 지역 지주들을 대상으로한 비공개 통보는 있었다고 한다.

▲58년 복개공사 당시 청계천으로 합류했던 개천까지 복개해, 청계천 근방의 골목은 옛 물길을 따라 구불구불하다. © 김응창 기자

탐험대원 권기봉씨(지구과학교육과·98)는 “개발 논리도 좋지만 항상 ‘개발의 그늘’로 밀려나는 건 빈민”이라며 이 같은 서울시의 비공개적 사업 진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공식적인 재개발 발표가 늦어지면, 빈민들에게는 집을 떠나라는 ‘날벼락’ 공문이 떨어질지도 모를 판이다. 권씨는 “58년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당시 청계천의 빈민들은 서울의 외곽인 난곡, 성남 등으로 이동했고, 남은 사람들은 제각각 청계천의 뒷골목에 생활터전을 잡은 것인데 재개발이 진행되면 그들은 두 번 버려지는 셈이 된다”고 지적한다. 이후 68년 세워진 근대화의 상징 ‘청계 고가도로’ 그늘 밑에서 청계천 빈민은 30여 년을 지냈다.

이제 그 하천을 덮고 있던 도로가 걷히고 청계천이 드러난다. 청계천에서 30여 년 살아온 서갑술씨(74)의 한숨은 깊어만간다. 월세로 30년째 살아 정들었던 집을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는 68년 빚쟁이를 따라 부산에서 상경해 6개월간 여관에서 살며 빚쟁이를 따라 다녔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얼마 후, 부산의 가족을 불러 동대문과 무악재를 전전하다 청계천에 자리를 잡고 바나나 장사를 시작했다. 그 후 30년 동안 리어카 보관업이 그의 밥벌이였다. 그에게 청계천은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청계천에 거주하는 빈민들 사이에서 서씨처럼 개발시대에 상경한 이주민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이 날 서갑술씨를 만난 탐험대는 개인사 중심의 기록을 남길 예정이다. © 김응창 기자

58년 복개공사 당시 청계천만 복개를 한 것은 아니다. 청계천으로 합류했던 개천 또한 복개를 진행해 길을 텄기 때문에 청계천 근방의 골목은 구불구불해졌다. 현재의 청계천 뒷골목은 그렇게 형성됐다. 지금의 골목길을 보면 예전의 물길을 가늠할 수 있는 셈이다.

‘청계천 탐험대’의 임무 중 하나는 불도저로 밀어내기 전에 이 서울의 옛 골목길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것이다. 청계천 뒷골목의 건물들을 살펴보면, 일제시대부터 버텨온 건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건물이 남았으니 길 모양도 남은 것이다. 근대의 신화적 구조물 사이에서 공간의 폐허로 사라지는 또 다른 근대에 대한 탐험대의 관심은 오는 11월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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