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 ‘넘실’, ‘사베’, ‘아톰’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이 생소한 단어들이 ‘엔’, ‘원’, ‘달러’처럼 ‘가치’를 담고 있다면 믿어질런지. 이들이 바로 물질적 가치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더 큰 가치를 함께 담고 있는 지역화폐다. 지역화폐는 전세계적으로 무려 2,700여개를 훌쩍 넘을 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개념으로 국내에서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져왔다. 이렇듯 국내 여러 공동체에서 사용되고 있음에도 낯설기만 한 지역화폐의 정체는 무엇일까. 공동체 정서가 익숙한 우리나라에 깃든 지역화폐의 이모저모와 내일을 알아보자.

 

'착한 돈', 지역화폐

화폐의 사전적 정의는 ‘경제적 교환수단’이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재화 화’, ‘비단 폐’, ‘화폐(貨幣)’의 한자어를 찬찬히 뜯어보면 돈의 시초는 물물교환의 일환으로 비단 등을 사용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지역화폐운동에 동참했던 가라타니 고진이 분석했듯이 화폐에는 신학적 마력이 있다.(『트랜스크리틱』) 화폐의 교환능력은 교환될 사물의 사용가치보다 매혹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화폐 그 자체가 다른 가치들을 누르고 가장 상위에 놓인 현 시대에서 화폐를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또다른 교환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지역화폐는 1983년 캐나다의 작은 섬마을 코목스 밸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마이클 린턴이 고안해낸 이 새로운 수단은 지역 내에서 구성원 간의 친목을 다져주면서도 재화와 서비스를 유통시키는 돈의 기능을 하기에 ‘지역화폐’라고 명명됐다.
 
지역화폐는 기존화폐와 상이한 특성을 드러낸다. 기존화폐는 금융기관에 돈을 저축함으로써 가치가 불어난다. 그러나 지역화폐는 정해진 사용 기간을 넘기면 화폐의 값이 깎이기 시작하는 ‘마이너스 이자’ 개념에 기반을 두고 유통된다. 이처럼 축적이 아닌 교환에 초점을 두고 있는 지역화폐는  ‘돈이 돈을 버는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지역화폐가 차단하는 불평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역화폐는 해당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자격조건 없이 획득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어 구성원 간 동등한 관계를 이끌어내는데도 기여한다. 노동시간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지역화폐 시스템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에 상관없이 노동에 대한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한편 해당 공동체 내에서만 사용된다는 특성은 공동체를 원활히 운영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지역화폐가 돌고 돌며 창출한 가치들은 외부로 흐르지 않고 공동체 내에 고스란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지역화폐는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양만큼만 생겨나기 때문에 유통되는 화폐량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수요량과 실제 유통되는 화폐량의 차이로 오는 혼란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웃사촌 맺어주는 살가운 지역화폐
 
이런 지역화폐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언제일까. 민간단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은 1997년 경제위기 당시 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국내 지역화폐의 효시인 ‘미래화폐’를 만들었다. 이렇게 첫 발을 내딛은 국내의 지역화폐는 우리 고유의 전통인 두레와 품앗이의 전통을 이으며 우리사회의 공동체 정신과 밀착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지역화폐가 가장 잘 정착된 사례는 대전 한밭레츠의 ‘두루’다. 한밭레츠에서는 기존화폐와 두루를 혼용해 농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장터와 요리, 자수, 외국어 등을 배울 수 있는 품앗이 학교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또 공동체에 소속된 의사들이 뜻을 모아 문을 연 민들레 의원에서는 두루를 사용해 진료를 받을 수도 있다. 보험혜택이 가능한 진료는 전액을 두루로 지불하고 보험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현금과 두루를 함께 지불하는 식이다. 이렇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기틀을 다져온 대전 한밭레츠는 ‘두루’의 뜻처럼 골고루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탄천의 흐름처럼 지역민의 교류가 넘실거리기를 바란다는 뜻이 반영된 성남시의 ‘넘실’은 문화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는 지역화폐다. 넘실이 적용되는 활동은 크게 교육 품앗이, 장터 품앗이, 공간 품앗이로 나뉜다. 교육 품앗이에서는 악기 교습 등의 활동이 이뤄지고 장터 품앗이에서는 장터를 열어 구성원들이 손수 제작한 공예품을 사고판다. 공간 품앗이는 예술활동에 필요한 연습 공간, 공연 공간 등을 넘실로 대여해준다. 이렇게 넘실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문화를 누리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성남문화재단 문화연구부 유상진 과장은 “넘실은 국내 지역화폐의 후발주자이지만 구성원 간의 문화교류에 견고한 가교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역화폐는 주민 간 화합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시범 운영 후 사용이 확대 실시될 예정인 ‘S-머니’는 자발적으로 형성된 기존의 지역화폐와는 달리 서울시가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한 시스템이다. 서울시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과 일반 분양 아파트 주민 간의 소통을 위해 인터넷에서 지역화폐를 유통 관리할 수 있는 S-머니 시스템을 도입했다. 소소한 일에도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지역화폐의 특성이 경제력의 차이를 넘은 교류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 전망했기 때문이다. S-머니 체계를 받아들인 방화11단지 ‘정가든’은 이름처럼 ‘정이 가는 든든한 우리마을’로 거듭나길 바라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잘 담겨있는 공동체다. 공동체 정가든의 지역화폐 ‘가든’은 이미 오랜 기간을 함께 하면서도 소원했던 주민들을 끈끈하게 엮어주는 발판이 됐다. 구성원들은 재봉틀질로 이웃집 아이의 옷을 수선해 주기도 하고 일자리가 없는 이웃에게일터를 주선해주기도 하며 정과 나눔을 쌓아가고 있다.   
 
지역화폐의 오늘과 내일
 
이렇듯 지역화폐는 공동체의 생활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지역화폐의 존폐는 지역공동체와 그 맥을 함께하기도 한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없이는 지역화폐가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온 우리나라의 지역화폐 역시 공동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공동체는 지역화폐와 함께 활성화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지역 공동체가 쇠퇴하는 추세로 인해 지역화폐 또한 위축되기도 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국내에서도 특화된 지역화폐가 등장하고 있다. 인터넷이 일상화되고 온라인상에서 공동체가 생성되는 추세가 확산됨에 따라 등장한 이 신개념의 지역화폐는 바로 소셜커머스 버니닷컴의 ‘품’이다. 버니닷컴이라는 온라인 공동체에서 사용되는 ‘품’은 각자가 거래에 필요한 일정량의 ‘품’을 발행해 유통시킬 수 있다. 개인이 현금을 지불해 이미 발행된 사이버머니를 구입하는 방식과는 상이하다. 대개 거래의 대상인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 주체는 사업자가 되기 마련인데 버니닷컴에서는‘품’을 매개로 회원들 간의 교류를 이끌어 낸다. 사람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기존 지역화폐와 성격이 같은 셈이다.
 
공동체의 회복을 기치로 내세워 발전해온 국내의 지역화폐 시스템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명맥을 이으며 다양한 형태로 공동체 정신을 실현해 왔다. 새로운 공동체의 흐름을 흡수해 변화해 가려는 지역화폐의 귀추에 주목해보자. 또 혹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역화폐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관심을 갖고 다가서 보는 것은 어떨까. ‘함께’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즐거운 난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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