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회의록은 일본 작품? 『금수회의인류공격』의 번안 작품일 가능성 높아
번안작품에 대한 재조명 기회 제공해… 이식문학론 콤플렉스 벗어나는 계기 돼야

개화기 신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이 창작물이 아니라 일본 문학의 번안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서재길 교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금수회의록』이 일본의 신문기자 겸 소설가인 사토 구라타로의 『금수회의인류공격』(1904)의 번안 작품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금수회의록』은 당시 세태를 풍자한 정치 비판 소설로, 많은 교과서에도 소개돼 있을 정도로 한국 근대 문학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으나 이번 논란으로 그 위상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금수회의록』이 번안 작품이라는 주장은 이전에도 있었다. 현재 일본 니쇼낙사 대학에 재직 중인 세리카와 테츠요 교수는 1970년대 중반 메이지 시기 정치소설인 『인류공격금수국회』(1885)가 『금수회의록』의 원작이라고 주장했으나 국가 정체성 정립에 집중했던 당시의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되지 못하고 후속 논의 없이 일단락됐다. 그런데 최근 원작일 개연성이 보다 큰 『금수회의인류공격』이 발견되면서 『금수회의록』 번안설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되고 있다.


서 교수에 따르면 『금수회의록』은 사토 구라타로의 『금수회의인류공격』과 상당히 유사하다. 먼저 서 교수가 『금수회의록』이 번안물이라는 주장의 가장 큰 근거로 제시하는 서언은 거의 번역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표현이 일치한다. 또 『금수회의록』에 등장하는 동물 8마리 모두 『금수회의인류공격』의 동물 44종류에 포함돼 있다. 작품의 표지나 삽화도 유사하다. 정선태 교수(국민대 국문학과)도 “여러 근거로 미루어봤을 때 서 교수의 주장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금수회의록』은 창작품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일련의 유사점이 있지만 원작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차이점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금수회의록』은 원작에 없는 해설이 있다. 또 한자와 가나를 동시에 사용하는 원작에 비해 『금수회의록』은 고사성어와 같은 표현들도 순한글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상의 차이에서 독자층을 지식인들로만 한정하지 않았던 안국선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서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이는 단순한 표기 체계의 차이 뿐 아니라 두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층에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밝히며 원작보다 더 급진적인 『금수회의록』의 성격을 강조했다.

각 장의 제목을 원작에서 그대로 따오지 않았던 것도 눈길을 끈다. 『금수회의인류공격』을 이루는 단편들의 제목은 등장인물의 서식지와 동물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지역적 공간의 대변자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회’적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금수회의록』은 고래의 문헌에 근거해 ‘가마귀’, ‘개고리’등을 제목으로 삼았다. 이는 당시 중앙집권적 왕권 전통에 길들여져 의회 체제의 이해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조선 독자들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최원식 교수(인하대 국문학과)는 “이는 원작을 그대로 번역한 것에서 머물지 않고 자국 독자층을 위한 변용을 통해 번안 문학의 능동성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평했다.

서 교수의 이번 연구는 그간 잘못 알려졌던 통념을 바로잡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동안 개화기 문학의 울타리 안에 쉽게 편입되지 못했던 번안 작품들에 대한 재조명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권보드레 교수(고려대 국문학과)는 “번안 작품이 창작품과 비교했을 때 동등한 위상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한국의 경우는 특히 ‘민족 만들기’에 집중했던 근대 문학 정립의 기류가 창작과 번안의 과도한 구별 짓기를 초래한 측면이 있다”며 창작 주체의 국적에 지나치게 매몰됐던 근대 민족주의를 ‘이식문학론’ 콤플렉스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번 발표를 통해 창작품이 아닌 번안 작품으로서의 『금수회의록』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위상에 흠집이 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정선태 교수(국민대 국문학과)는 “창작품으로서 『금수회의록』이 가졌던 위상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단순히 번안이라는 이유로 『금수회의록』의 문학사적 가치를 폄훼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금수회의록』의 위상은 몽유, 송사, 우화 등 한국 전통 문학의 특성을 견지하면서도 당시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흔치 않았던 정치 비판의 기조를 가졌다는 점에서 정립됐다. 최 교수는 “번안 작품으로서의 『금수회의록』 역시 시대에 맞서고 계몽을 꾀했던 작품 속의 문제의식과 자국의 환경에 맞춘 변용 시도에서 나타나는 능동성을 함께 고려해 그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며 한국 전통 문학의 재래적 원천과 계몽기의 시대적 사명을 담고 있는 『금수회의록』의 가치를 역설했다. 이어 최 교수는 “번안이 외국으로부터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고는 스스로 한국 문학의 영역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문학사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며 “번역 또는 번안이 창작 못지않은 의미를 생성한다는 벤야민의 견해를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또한 최 교수는 “번안 문학은 앞으로 근대 문학에 영향을 줬던 내재적, 외재적 요인들을 균형 있는 시각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하는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논문 말미에 젊은 세대 연구자들에 의해 개화기 문학의 지형이 원점에서 재검토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언급하며 “당시 정전(正典)으로 간주되는 텍스트들이 일본 메이지 문학의 번안이라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번 논의가 창작과 번안의 경계에 서 있는 한국 근대 문학에 분명한 ‘위기의 징후’로 비쳐지며 문학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시각을 야기하는 신호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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