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의 형이상학, 또는 들뢰즈주의의 쉬볼렛

오랫 동안 기다려 왔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가 마침내 번역ㆍ출간되었다. 들뢰즈를 사랑하는 독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철학 전공자들도 크게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들뢰즈의 저서들 중에서도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책들을 원서의 가치에 걸맞는 노력과 정성으로 잘 번역해 냈으니, 더욱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약 30여년 전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운동이 절정을 지나 숨가쁜 갈등과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화를 거듭하고 있을 때, 프레드릭 제임슨은 구조주의 운동을 20세기의 독일 관념론 운동으로 지칭한 적이 있다. 서양 근대철학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룩했던 독일 관념론 운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 운동은 레비-스트로스, 라캉, 캉길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과 같이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수많은 철학자-사상가들이 각 분야에서 하나의 시대를 가름하는 중요한 업적들을 배출했을 뿐아니라, 롤랑 바르트, 알랭 로브그리예, 장뤽 고다르, 피에르 불레즈 같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들이 철학과 정치를 가로지르며 20세기 후반 문화의 면모를 일신했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실체론에 대한 비판

 

제임슨의 예견의 정확성 여부는 나중의 철학사가들에게 맡겨두더라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조주의 운동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역시 구조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될 때 그 의의와 중요성이 좀더 정확히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후에 발견된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8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푸코의 다소 과장된 예언(“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을 제외한다면, 풍부한 내용과 비범한 깊이에도 불구하고, 재능있는 한 소장 철학자의 학위논문으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이 책의 중요성과 가치가 발견되고 재발견된 것은 『앙티 오이디푸스』(1972),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천 개의 고원』(1980)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이 책이 사후에야 재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지닌 내용상의 특성 때문이다. 전성기 구조주의 철학들과 비교할 때 이 책은 두 가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구조주의 운동은 형이상학, 더 나아가 철학 자체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고발, 탄핵의 움직임과 분리될 수 없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20세기에 보기드문 거대한 형이상학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둘째, 다른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같은 사상가들의 작업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스토아학파에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매우 낯선 철학적 계보의 끝자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에는 매우 유별난 것으로 간주되었던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적 건축, 그 철학적 계보는, 구조주의의 다양한 경향들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운동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서양 철학사의 감춰지고 잊혀진 흐름들을 길어내고 있음이 사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초월론적 경험론 또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우리에게 낯선 이 철학은 (주체론을 포함하는) 실체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따라서 관계론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이루는 거대한 저수지들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주름』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주름이라는 표제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접고 펼치고 다시 접는 주름의 운동으로서 라이프니츠 철학은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되는 내적 차이화의 운동을 간명하게 표현해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성이 어떻게 외부의 운동에 의거하고 그로부터 구성되는지, 따라서 주체성이 어떻게 외부적인 관계들에서 파생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주체성의 파생과정 설명

 

 

 

그러니 이 책들을 구조주의의 형이상학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들뢰즈주의의 쉬볼렛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앞으로 사람들이 이 책들을 통해 들뢰즈주의의 식별 기준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뢰즈주의자라 부르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제대로 읽고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개념들을 되는 대로 주워섬기며 들뢰즈주의자로 자처해온 이들에게 이 책들은 오히려 큰 도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들은 사후성의 저작들이라 부를 만하다.

 

진태원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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