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K리그 1라운드 인천 대 대전 경기에서 인천 홈팬들은 눈에 띄는 응원문구를 들고 나왔다. “힘내 일본. 쓰나미따위에 지지마.” 아직까지 피해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이번 대지진을 염두에 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였다. 한 축구 칼럼니스트가 이 말을 조금 수정해서 받아 쓴 문장이 네티즌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일본은, 이겨도 우리가 이긴다. 쓰나미따위에 절대 지지 마라.”

이 문장이 조금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 문장에는 확실히 무협지 풍의 과장된 비장미와 순정만화 풍의 지나친 순진함이 버무려진 일본 스포츠 만화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다. 이 때문인지 냉소적인 사람들은 축구 칼럼니스트의 문장에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비극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반사이익이 무엇일지 계산하는 사람들,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게 도움을 줘야 그 도움 이상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 ‘투자’를 계획하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이 문장에는 분명 어떤 건강함이 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일본이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다.” 칼럼니스트는 일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증오로 얼룩진 경쟁의식이 숨겨져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자신의 시각을 수정할 능력 또한 같이 보여줬다. 먹이를 찾아내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능력은 동물에게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상처받아 타인을 위해 제 입 속에 들어갈 빵을 끄집어내는 것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칼럼니스트는 타인의 고통에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했고 더불어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했다. 이런 증명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각종 언론매체가 일본의 비극을 ‘스펙터클 영화’의 형식으로 전하고,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도록 권장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 우리의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둔감하게 만드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소박한 인간 증명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볼 수도 있을까. ‘스펙터클 영화’의 형식으로조차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 재난들에 대해서 말이다. 지진에 의한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의한 흔들림으로 삶이 붕괴된 사람들, 예컨대 경영파탄으로 3천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내몰리고 2009년 이래 자살과 돌연사 등의 이유로 무려 13명이 숨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가 일본의 고통에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며 따뜻한 손길을 보낸 것처럼, 이웃의 고통에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며 경영악화의 과실을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을까.

권희철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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