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조 지음ㅣ문학동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 나에게로 와서 / 꽃이 / 되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로 꼽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다. 이 시가 노래하는 것처럼 세계가 마음속에서 의미를 얻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생각은 “눈이 있어 보는 게 아니라 보려는 의지가 눈을 만들었다”는 불교의 인식적 토대와도 상통한다. 한 동양 고전 학자의 의지가 거름을 준 것일까. 이름에서부터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금강경도 이제 당신에게 다가와 ‘꽃’이 될 수 있게 됐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형조 교수가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라는 제목의 금강경 별기(別記)를 펴냈다. 본문에 덧붙인 해석을 따로 제시하고 있는 별기의 형식을 통해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것은 금강경 속에 담긴 불교의 정신이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 『왜 동양철학인가』 등 다수의 동양 철학서들을 펴내며 그간 동아시아 고전의 숲을 묵묵히 헤쳐 온 저자는 영화와 문학 등 일상의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들이 불교 철학의 금강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제목의 금강경 주석본 소(疏)와 함께 펴낸 이번 별기는 선(禪)과 교(敎)의 극단 가운데 중용을 취하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에 부합해 일상 언어의 지평에서 지혜를 전한다. 경어로 전해지는 이야기일지언정 깊이와 사색의 공간을 잃지 않는 저자의 목소리는 공(空)을 말하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은 불교의 내용과도 닮았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은 저자가 스스로 말하듯 “불교 개론”의 성격을 띤다. 금강경은 붓다가 제자 수보리를 위해 설한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진수를 드러내는 경전이다. “불교는 하나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번 저서에서 비단 금강경이 전하는 메시지 뿐 아니라 도(道), 연기설 등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에 대한 설명도 아울러 전한다.

방대한 불교적 사유의 담장을 넘나드는 이번 저서에서 독자들을 위한 저자의 궁극적 호소는 진정 행복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먼저 구원하라는 제언이다. 자신의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을 속박하는 원인이 바로 인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속박의 고통은 ‘자기 관심’의 완강한 뿌리로부터 발현된다. 저자에 따르면 주관에 의해 세계를 형성한 인간은 스스로 만든 환상에 고착돼 타자를 용인하지 못하고 치유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자기 관심은 자기기만과 정당화와 유착한다. 인간의 자기기만이 어떤 정도에까지 이르는지에 대해 저자는 「라쇼몽」이라는 영화의 내용을 차용해 상술하고 있다. 「라쇼몽」의 등장인물들은 동일한 살인 사건을 두고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조작한 기억을 토대로 승려에게 사건에 대한 판이한 진술을 내놓는다. 심지어 이미 사망해 무당으로부터 불려나온 영혼도 자신의 환상을 진실인 양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승려는 인간 존재의 거짓됨에 탄식한다. 저자는 「라쇼몽」의 인물들이야말로 기만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말하며 환상과 주관에 속박된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전한다.

저자가 말하는 불교적 대안은 “삶의 태도를 혁신하라”라는 정언이다. 이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바가 환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돈오(頓悟)라 불리는 그 깨달음은 궁극이 아닌 방편이다. 돈오는 그 자체로 행위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이미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가 만들어낸 허상 속에서 괴로워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돈오와 함께 깨달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점수(漸修)도 함께 강조한다. 

저자는 불교는 스스로 고매한 철학이라는 언명을 부정해왔기에 위대해졌다며 ‘불교’라는 이름에 내포돼 있던 막중한 무게감을 떨쳐버리라 말한다. ‘더 얻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처세술에 관한 서적들이 늘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는 결핍된 시대에 오히려 ‘더 비울 것’을 독려하는 불교의 지혜는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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