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현대의 거의 모든 제품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도체와 부도체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반도체는 전자의 이동 통로인 회로를 구성하는 소자들의 원재료가 되며 전류의 출입을 관리하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반도체 회로를 제작하는 과정에 나노 기술이 적용되면서 제품의 소형화와 기능 다변화를 함께 꾀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의 ‘스마트’한 제품들 다수도 이러한 나노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반도체 공학에 적용되는 나노 기술 중 대표적인 것은 ‘나노 CMOS 소자 기술’이다. CMOS는 반도체 회로의 설계 기본 단위로 집적회로의 일종이다. 이는 회로라는 도로가 여럿이 모여 형성한 교차로와 같다. 전자가 흐르는 도로가 단 하나로 구성돼 한 쪽 방향으로만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로들과 교차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하는 흐름의 단위인 것이다. 가령 전기 기기를 구성하는 소자를 집을 짓는 데에 필요한 벽돌에 비유한다면 CMOS는 이 벽돌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조합 방식이다. 나노 CMOS 소자 기술은 이렇게 조합된 소자들의 길이를 나노 단위로 축소함으로써 반도체의 크기를 줄이거나 같은 면적의 기판에 더 많은 조합을 장착할 수 있게 한다. 개별 소자 기술의 개선을 통해 전체 시스템의 고속화와 대용량화 및 다기능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이는 나날이 높아지는 CPU 연산속도 향상, 플래시메모리 용량의 증가 등의 기술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나노 CMOS 소자 기술은 미세한 소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제어가 쉽지 않지만 미국 노스웨스턴대 머킨 팀이 고안한 나노 리소그래피 기술 등 나노 CMOS 공정을 위한 후속 연구도 진행 중이다. 반도체 회로는 일반적으로 ‘리소그래피’라는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다. 리소그래피 기술은 실리콘 기판에 감광제(感光劑)를 입힌 뒤 특정 부분에 빛을 쬐었을 때 각 부분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화학 반응을 이용한다. 이 반응으로 빛을 쬘 때마다 기판 표면을 한 겹씩 벗겨내거나 소자를 접합시킬 수 있다. 빛과 화학반응을 이용해 판화와 같은 그림을 찍어내는 기본적인 리소그래피 기술과는 달리, 나노 리소그래피는 주사침을 펜처럼, 나노 단위의 원자나 분자를 잉크처럼 사용해 반도체 회로를 직접 그려낸다. 이 기술은 다양한 구조의 반도체 회로를 기존의 방법에 비해 훨씬 작은 크기와 저렴한 비용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거의 모든 물질을 나노 잉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크로 선을 그을 수 있는 물질의 범위 또한 확장돼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

IT분야에 적용되는 나노 기술이 반도체 회로를 제작하는 공정 개발과 같은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노 단위 수준의 IT기기 부품 제작과 함께 물질이 작아졌을 때 띠게되는 성질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기 때문이다. 박수영 박사(전기공학부·박사 후 과정)는 “나노 기술은 나노 단위의 물질을 조합하는 기술과 더불어 물질을 나노 단위로 쪼갰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성질에 대한 연구를 포함 한다”고 말했다. 박영준 교수(전기공학부)는 “물질의 크기가 작아지면 그동안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특정 성질을 강하게 띠기도 한다”며 “일례로 금의 경우 노란색의 성질을 띠지만 이를 작은 규모로 쪼갰을 때는 노란색만이 아닌 여러 다른 빛의 파장을 반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물질이 작은 규모에서 어떤 성질을 나타낼지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은 이른바 ‘양자효과’에 의한 현상이다. 나노 기술은 원래 해당 물질이 띠던 성질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는 물론 두드러지지 않았던 특정 성질을 도출시키기 위한 양자 효과 유도 연구 모두에 활용된다. 가령 실리콘은 원래 발광하지 않지만 수십 나노미터에서 100나노미터의 공 모양을 한 물질을 일컫는 양자점(quantum dot)정도까지 크기를 줄이게 되면 빛을 낼 수 있다. 매우 작은 공간에 갇힌 전자는 빛과의 상호작용이 매우 강해지기 때문에 빛을 발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양자점의 크기에 따라 빛의 파장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이를 이용해 빛의 3원색인 빨간색, 녹색, 청색의 발광 다이오드(LED)를 조합하는 디스플레이 기술이 발달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0월 이창희 교수(전기·컴퓨터공학부)를 포함한 교수팀은 다양한 색을 발산하는 발광소자의 적층 기술을 고안했다. 이 연구는 양자점 기반 디스플레이 개발에 필수적인 양자점 화소 패턴 형성을 균일하게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이교수는 “나노입자들은 서로 엉겨붙는 성질이 있어 양자점들을 균일하게 여러 층으로 쌓기 어렵고 양자점들이 화소 내에 불균일하게 분포되는 문제가 있었다”며 “용매에 양자점 반도체를 녹여 이 잉크를 균일하게 프린트하는 기법을 통해 기존의 양자점 발광소자가 가졌던 패턴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기술은 기존 디스플레이 공정보다 훨씬 간편해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자체의 두께도 줄일 수 있고 딱딱하고 깨지기 쉬운 유리 기판 대신 유연한 플라스틱 기판에도 구현할 수 있어 더욱 각광받고 있다.

현대인들의 삶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전자기기들은 지금 이 순간도 더 똑똑해지고, 더 작아지고 있다. 날로 발전하는 IT 기술은 여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인류 기술 패러다임의 변혁 열쇠를 쥐고 있는 ‘난쟁이’ 나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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