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과 석사과정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래킹을 위해 네팔로 가려면 카트만두 공항에 내려서 택시로 여행자 거리 타멜로 가야 한다. 이 트래킹은 3주간 해발 5,500m를 넘어가는 길이다. 놀라운 산들과 그 산에 융화된 히말라야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경험하면서.

이 길은 오래전부터 히말라야에 살았던 민족의 삶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산 속 수많은 작은 마을을 지나고 소똥을 밟고 그 곳 음식을 먹는다(물은 현지인들의 것과 여행자의 것은 구별되어 있긴 하다). 그들의 생활은 종교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이 길을 걷는다면 비록 당신이 티벳 불교도가 아니라도 무수히 많은 마니차를 돌리며 기원하게 될 것이다(마니차는 티벳 불교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한 번 돌리면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진다. 네팔 사람은 거의 힌두교를 따르나 티벳 불교와도 공존하고 있으며, 산에는 특히 티벳 불교가 많이 퍼져 있다). 자연과 융화된 히말라야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어떤 경험의 심오함을 찾도록 만드는 것 같다. 마실 물이 부족하고 화장실에도 물이 없고 등도 없고 난방이 안돼 바지 내린 엉덩이가 몹시 춥고 쌀쌀한 그 곳 사람들이, 컴퓨터와 보일러와 에어컨과 일회용 휴지가 지천에 깔린 이 곳 사람들보다 행복해 보이고 매력적인 것은 왜일까? 티벳 불교에서 말하듯, 그 곳의 소리가 만드는 진동이 사람 내부에 있는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네팔은 몇 년 전 왕정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한동안 파업과 소요사태가 있었고, 우리 외교통상부는 여행자제국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수도 카트만두를 제외하고 모든 지역이 사회주의화 되면서 마침내 왕이 스스로 하야했으며,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평화롭게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신분제가 사라진 것이다.

사회주의 정부는 가장 먼저 산 속 마을에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 만성적인 수도 과밀화를 해소하고 서민층을 지원하며 관광인프라를 갖췄다. 네팔은 그 때 열광했고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심이 한국에 대한 관심에도 투영되고 있었다. 산을 내려와 머무른 포라카는 아름다운 호수로 왕의 별장이 있다. 혁명 이후에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 곳을 지키던 군인이 한국에 대해 물었다. 한 달에 한화 10만원을 받는다는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대단히 가고 싶어 했다. 포카라는 네팔에서 제2의 도시다. 그는 산 위의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말쑥했고 영어도 잘했다.

마치 좀 우월해진 것 같은 느낌 속에 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좀 우울해졌다. 그에게 나는 부러운 사람이었는지 모르나 나는 과연 그가 부러워 할만했던가? 그것은 마치, 그는 한국에서 네팔보다 높은 GDP를 떠올리지만 나는 암과 교통사고 다음으로 산재와 자살로 사람들이 죽는 나라라는 것, 마트에 고기가 떨어지지 않지만 그 때문에 구제역이 발생한다는 것, 전기가 24시간 공급되지만 대신 원전을 짓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실은 나도 그처럼 좀 더 많은 돈을 벌기를 바라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가 돈을 좀 벌게 된다면 그도 히말라야를 찾아야 할까.

홍사용은 100년 전 이미 “불행한 도시 도취자들이여, 이 산거(山居)로 오라. 옹달샘 맑은 물에 머리를 씻고 일진불염(一眞不染) 만법개공(萬法皆空)의 청정심을 가져 거울같이 맑은 고령(高嶺)의 저 달을 바라보라. 제 아무리 정이 무디고 영혼에 곰이 된 사람이라도 무엇인지 모르게 인생의 하염없는 고적의 상(相)을 저절로 아니 느낄 수 없으리라.”고 썼다. 우리는 아직 배고픈 것인가, 아니면 도시 도취자인 것인가. 히말라야를 생각하면 우리는 쇠락한 문명의 황혼에 서있고 그 위에 청정한 어떤 것이 아직 오지 않은 채로 맑게 빛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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