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에 열광하던 나의 애창곡은 랄라라랄라 공격개시를 힘차게 외치는 노래였다. “메칸더 세 용사 단결하면 무적의 메칸더 브이 되어 원자력에너지의 힘이 솟는다.” 천하무적 메칸더 브이에게도 약점은 존재했다. 5분안에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방사능을 쫓아 오메가 미사일이 날아오기 때문에 늘 마음 졸이며 응원하곤 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악당들도 미사일을 쏘기에는 고민이 됐을 것 같다. 그들이 정복하고픈 지구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같은 세상은 아니었을 테니까.

비극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현장에 투입된 후쿠야마 50은 수많은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본 동북부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들의 빛나는 희생에 가려져 이번 사태의 자초지종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사태 악화의 원인으로 도쿄전력의 대응이 거론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수조원에 달하는 원자로를 보호하려던 민간기업의 합리적 결정은 너무나도 비합리적 결과를 낳고 있다.

흔히들 원자력은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원으로 평가된다. 순간을 사는 이들에게 그 계산은 유효할지 모른다. 비용은 후대에 전가한 채 이득만을 계산한다면 그만큼 경제적인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며 원자력 발전에 드는 비용은 폐기물 처리와 발전소 폐쇄와 같은 전체 과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놓는 사람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또 자신이 먹은 후 누군가가 설거지를 헤야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일본의 비극은 숟가락만 얹어 놓는 사람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생산 과정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며 어떤 가치가 추구되는지가 바로 사용자의 생명과 직결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시장원리라는 이름 아래 안전보다 이윤을, 공공성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정보의 장막 안에서 의사결정의 무제한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발전 속에 숨겨진 비용은 편서풍을 타고 사라지는게 아니라 자본의 타자들, 즉 노동자와 자연에게 돌아가고 있다. 하이 리턴을 노렸던 원자력 발전은 생명이라는 담보물에 하이 리스크를 남길 뿐이다.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인식되지 못했던 가치들은 재앙 앞에서 자신들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978년 설계수명 30년의 고리 1호가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 후 34년, 고리 1호는 여전히 발전 중이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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