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천문학부
인류 과학사에는 이른바 ‘기적의 해’가 두 번 있었다. 1666년과 1905년이 그것이다. 앞의 것은 24세의 뉴턴이 고전역학을 완성한 해이고 뒤의 것은 26세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4편의 놀라운 논문을 쏟아낸 해이다.

사람들은 이 사건들에 어리둥절한 나머지 ‘기적’이란 말까지 붙였다. 나 또한 이 놀라운 사건들의 원인을 명쾌히 설명할 재간은 없다. 그런데 남들이 별로 눈여겨보지 못한 중요한 한 가지 단서를 잡았다. 두 경우 모두 이 업적이 나타나기 이전에 두 번씩의 의미심장한 공백 기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공백은 이들이 15, 16세 무렵 각각 학교교육을 중단하고 홀로서기 학습경험을 가진 기간이다. 출생 이전에 이미 아버지를 여읜 뉴턴은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의 명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2~3년간 농사일을 하다가 19세에 대학에 진입해 학업을 계속했다. 아인슈타인 역시 15세 되던 해에 당시 명문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을 스스로 뛰쳐나와 1~2년을 홀로 공부하다가 첫 번째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얼마간의 예비학교를 다닌 후 17세의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기간에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나 자신도 비슷한 이유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중단해 1~2년 간 홀로서기 공부를 해본 경험 때문이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혼자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고 이후 이것이 내 일생의 공부 방식으로 굳어졌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바로 내가 수시로 미지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공부를 시도할 수 있었던 바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이 지녔던 두 번째 공백은 대학교육을 마치자마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최소한 일 년 이상을 완전 백수로 보낸 일이다. 뉴턴은 때마침 흑사병이 창궐해 대학이 문을 닫자 고향집에 가서 누구의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학문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렇게 일년을 보낸 다음 해가 바로 1666년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조금 더 불행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무도 대학 조교로 채용해 주지 않았고 정규 교사 자리도 구하지 못했다. 몇 년간이나 방황하다가 겨우 특허국 3급 기사 자리를 얻어 이제 학문하고는 담을 쌓고 살겠거니 하던 시기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1905년의 기적이다.

이 또한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 있겠지만 나는 또 이 기간에 주목하고 싶다. 나 또한 대학 졸업 후 공식적으로는 학문의 전당을 떠나 있으면서 비로소 내 학문을 정리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통한 수동적 학업에 지치고 질린 나머지 학업을 거의 포기할 상황에서 나홀로 몇 년간 몰두해 공부한 것이 평생의 자산으로 남고 있다.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리해보자면 창의적인 학문에는 적어도 외부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홀로서고 홀로 숨 쉴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꼭 필요한 것 같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나오리라는 기대는 아예 접어버리자. 그들이 숨쉬기에 우리의 학습여건, 연구여건이 너무도 빡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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