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관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놓여있는 넓은 광장, 아크로 폴리스(아크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1975년, 관악 캠퍼스가 생긴 이후부터 아크로는 군부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장이었고 민주화 이후에는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진보담론의 성지'였다. 권력은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헌신하던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지만 그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크로에 모였다.

그러나 오늘의 아크로는 텅비어있다. 새로운 공동체를 고민하기 위해 선거를 준비하자고 외쳐도,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법인화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외쳐도, 사회적 약자들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자고 외쳐도 학생들은 더이상 아크로에 모이지 않는다. 아크로에 학생들의 열정이 불타오를 때는 오직 축제에 유명 연예인이 올 때 뿐이다. 이제 아크로에서는 어떤 이야기도오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학신문은 아크로의 과거와 현재가 담긴 사진들을 모았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아크로가 어떤 존재인지, 과연 지금 우리는 광장을 주인답게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 사진은 1985년 10월 31일 민주화 열사 故 우종원 열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는 도중 교내에 경찰이 진입해 학생들을 진압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1970, 80년대의 아크로는 독재 권력에 항거해 사회의 민주화를 외쳤던 민주화의 성지였다. 권력은 민주화 투사들에게 온갖 억압을 가했지만 그 어떤 권력도 민주화의 열망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아크로는 관악인들이 모여 자치를 고민하는 장소였다. 왼쪽 사진은 1985년 총학생회 출범식의 모습이다. 학생들은 과거 유신 세력이 강요한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자치 조직인 총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해 투쟁했다. 결국 학생들은 1984년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총학생회를 재건했다. 하지만 1987년 전까지 학교 당국이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총학생회는 예산 지원 문제, 정권의 탄압 문제 등에 부딪히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세운 진정한 자치 공동체의 상징인 총학생회에 열광했다.

 

 

통일의 염원이 서린 광장, 아크로

 1987년 6월 민주화 혁명의 성공 이후 아크로에는 여러 진보 담론이 터져나왔지만 이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역시 통일 담론이었다. 위 사진은 1992년 5월 열린 故 조성만 열사 4주기 추모식의 장면이다. 조성만 열사는 1988년 5월 명동에서 조국통일을 외치며 할복 후 투신자살했다. 그 뒤로 학생들은 조성만 열사의 넋을 기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 통일을 외쳤다.

 

 

아크로 민주화 이후에도 아크로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와 연대할 것을 주장했다. 사진은 2000년 5월 시설노동자 파업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본부 후생과를 점거하고 아크로를 향해 선전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2000년 시설 노동자들은 용역업체와의 협상 과정에서 임금 문제와 관련한 갈등을 본부가 직접 나서 교섭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고 이에 많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이들의 파업을 지지했다. 또 학생들은 평화적인 세계 질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2003년 4월의 이라크 전쟁 중단과 한국군 파병 반대를 위한 서울대 4ㆍ 2 동맹휴업 시위 당시의 모습이다. 3천 관악인들은 아크로에 모여 반전과 평화를 외쳤다. 아크로는 노동, 평화 등 사회 각계의 문제에 대한 진보적 담론이 생성되는 담론의 중심지였다.

  

 

텅 빈 광장, 아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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