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인문학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고 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다른 전공자들보다 기업에서 더욱 높은 기여도를 보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경영, 행정 등 분야의 중간간부에서부터 최고지도자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교육과정에서 인문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대 법인화 내용 중에는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을 보호하겠다는 취지가 분명하게 표명돼 있고 한국연구재단은 대규모의 인문한국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인문학의 새로운 유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한동안 걱정스럽게 논의됐 던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지나버린 옛이야기가 된 것만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앞에 말한 몇 가지 현상들은 전부 뒤집어 볼 수 있는 것들이고 뒤집어 봐야 오히려 진상이 나타나는 것들이다. 실제 취업 전선에서 인문학 전공자들은 여전히, 혹은 갈수록 더 소외되고 있고 기초학문 보호 취지의 표명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의 법인화는 인문학의 위축을 초래할 가능성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크다. 인문학 분야의 학문 후속 세대가 전임교수가 되는 비율은 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일종의 알리바이인 것이 아니겠는가. 보호니 지원이니 하는 말 자체가 그 대상을 보호받고 지원받지 않으면 위축 소멸될 운명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일 수 있으며 그 보호니 지원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대상을 위축 소멸될 운명으로 만들어놓은 뒤에 일종의 보상으로서 부여해주는 것일 수 있다.

특히 문제인 것은 앞에 말한 몇 가지 현상들 중 두 번째 것, 즉 경영,행정 등 분야의 중간간부에서부터 최고지도자에 이르기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교육과정에서 인문학이 인기를 끄는 현상이다. 이 인기는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이 인문학에서 어떤 유용성을 발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문제는 그 유용성이란 과연 어떤 유용성인가 하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인문학에는 본래부터 양면성이 있었다. 약간의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써야겠다. 시민사회 형성 시기에 인문학은 봉건적 구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신질서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전자로 보면 체제에 대한 비판성이 부각되고 후자로 보면 체제와의 협력성이 부각된다. 이 경우 비판의 대상인 체제와 협력의 대상인 체제가 상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서 고대 중국의 경우를 보면 공자님께서 제후들을 상대로 유세를, 즉 일종의 인문학 교육을 하셨을 때 그것은 그 제후의 기왕의 통치를 비판하고 그 통치를 새롭게 개선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 경우 비판과 협력의 대상이 동일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예컨대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은 시민사회 형성기의 인문학보다는 공자 시대의 인문학에 가깝다.

다시 물어보자.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이 인문학에서 유용성을 발견했다면 그 유용성은 어떤 유용성인가. 비판성의 그것인가, 협력성의 그것인가. 공자 시대의 제후들은 비판성의 그것을 거부하고 협력성의 그것만을 요구했다. 공자께서 제후들에 대한 인문학 교육을 포기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의 인문학은 과연 어떤 처지, 어떤 입장에 있는 것일까. 양면성이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과 그 중 어느 한 면을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것 사이에는 심연과도 같은 거리가 존재한다. 더구나 그 선택이 협력성의 배타적 선택일 때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문학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아프게 가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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