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속(俗)이 아닌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학내구성원은 무관심 극복하고
학내 사안에 관심기울여야

 

송규민 학술부장
신학기 캠퍼스에는 종종 전도(傳道)하는 장면이 눈에 띄지만 신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은 것 같다. ‘말씀’이 접근하기만 하면 손사래부터 치는 일부 학우들을 보면 거리에서 만나는 성(聖)스러움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나 보다.

『지식의 원전』에서 존 캐리 교수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종교와 과학이 실은 진리를 좇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과 종교는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각각 법칙과 신의 계시라는 ‘증거’에 의존하기 때문에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과학과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것은 정치다. 지식의 영역인 과학과 달리 정치는 견해의 영역이며 웅변술과 말잔치를 통해 진리의 위치로 상승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종교와 정치는 과학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지만, 요새 캠퍼스 풍경을 보면 자꾸 그 둘이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확성기로 법인화법 폐기를 외치는 이들, 작년의 단과대 학생회 선거무산의 여파로 신학기인 지금 리플렛을 한아름 안고 수업 전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우들. 학생사회에서의 권력 획득·유지·행사 혹은 학내 구성원 상호간의 이해 조정이 목적이라면 그 활동도 사전적 의미의 ‘정치’로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에 대해서도 학우들의 관심이 마땅찮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다가 후엔 무관심하게 되고 나중엔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푸대접을 받는다는 점에서 학내 전도와 비슷하지만 원인은 달라 보인다. 너무도 성(聖)스러워서 학우들에게 낯가림을 유발하는 게 신(神)의 ‘말씀’이라면 우리에게 정치는 너무 ‘속(俗)’되기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기는 게 아닐까. 아니면 존 캐리가 말한 것처럼 ‘웅변술과 말잔치’를 이용하는 정치는 ‘과학’의 영역에 살고 있는 학우들에겐 비루한 것으로 보이는 것일지도.

민주화의 성지(聖地)인 아크로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선배들의 투쟁에는 성스러움의 옷이 덧입혀진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가.  ‘민주’라는 지고의 이념 아래 대동단결할 수 있는 것도, 과거처럼 ‘공적(公敵)’이 있어 강한 동류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단 간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고 학내에서 정치 활동을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는 보수화된 20대 앞에서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기 십상이다. 이쯤 되고 보면 학내 정치 활동이란 철판 깔고 덤벼들어야 하는 속무(俗務) 중의 속무이기에 정치 활동은 학우들의 높으신 학구열에 외면 받고 과거 학생운동의 성스러움에 대한 환상에 또 한 번 비하되는 것 같다.

지난주 본부 점거 사태는 분명 큰 정치적 사건이었다. 나에겐 총장님이 퇴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학생들의 무관심에 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더 유감이었다. 학생들의 정치적 입장까지 간섭할 오지랖도, 식견도 없다. 하지만 단지 그 일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은 정치가 얼마나 세속적이며 스펙과 여가란 얼마나 고고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줬다.

 

정치학도가 아닌 까닭에 나는 제도권 정치학에서 규정하는 세련된 개념은 습득하지 못했지만 학내의 ‘정치적’ 무관심을 바라보며 소박한 정의 하나를 기억하게 된다. 수습기자로 광화문에 첫 취재를 갔을 때 자신을 ‘정치가’로 소개한 장애인 인권 활동가는 “주변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바람직한 길을 고민하는 것”으로 정치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내렸다. 순진하다고 생각하며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그 말이 정치에 관한 꽤나 정의로운 정의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본부4층의 열기가 뜨겁던 새벽, 맞은 편 중도3열의 열기도 만만찮게 뜨거웠다는 사실로 씁쓸해 한다면 그건 나의 과민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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