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철학과
나는 현대사회를 일컬어 디지털-사이버 후기 자본주의 사회라고 부른다. 자본주의의 세 요소는 자본, 생산수단 및 노동이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세 요소들에 정보와 아이디어 그리고 디지털기기에 의한 가상공간이 더해져서 디지털-사이버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졌다.


디지털-사이버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문명사회이자 문화사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예리하게 바라보면 그 안에서 신음하는 존재는 바로 욕망의 기계, 곧 현대인이다.

언제부터인가 그리스의 완전성(로고스, 곧 이성이 전제하는)과 기독교의 절대성(전지전능한 신이 전제하는)은 인간의 욕망의 핵심을 차지하고 인간을 한낱 욕망의 기계로 전락시켜버리고 말았다.

요새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생들도 자기들이 욕망의 노예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젊은이들 대부분은 무조건 그리고 무한히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욕망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진(眞), 선(善), 미(美)를 진지하게 추구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입시학원들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왜 일류대학을 졸업하여야 하는 것일까? 서울의 강남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성형외과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들과 일부의 남성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한 마디로 욕망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지배하고, 내가 타인보다 우월하고, 내가 타인보다 더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한 이기적 욕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평등과 자유의식이 희박하고 따라서 공정함의 개념이 사람들에게 이론적 및 실천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서구인들은 공정함으로서의 정의를 사회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일천년 이상 피와 땀을 흘리고 무수한 전쟁들을 통해서 다양한 체험의 지평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은 물론이고 봉건군주나 왕도 탐욕을 일삼고 자기만의 영화를 누리기에 급급할 경우 시민들에게 체포되고 사형당하는 체험이 반복되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싹트게 된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넷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을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권리로 전환시켰다. 그때  이들은 권리는 자유에 의한 수직적 인간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욕망의 기계들이 ‘여유’를 상실한 채 완전하고 절대적인 욕망충족을 위해서 전력질주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시인은 이 사회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벌레일 뿐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시인은 삶의 의미와 가치라는 영롱한 이슬을 토해내는 벌레이다.

이 황량한 디지털-사이버 후기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가치있는 것은 드물고 힘들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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