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제34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아이젠하워. 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컬럼비아 대학 총장, 나토군 최고사령관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 공직생활을 수행했다. 이런 이력을 가진 그가 대통령직을 떠나며 미국 국민에게 의미심장한 당부를 남겼다. 역사상 유례없는 군산복합체의 성장과 이의 첨병인 과학기술 엘리트의 발호를 경계하고 후손들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군축을 단행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자신의 작업실에서 외롭게 작업하는 발명가는, 실험현장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자유로운 착상과 과학적 발견의 원천이었던 자율적인 대학 역시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연구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때문이겠지만 정부와의 계약 및 지원이 사실상 지적 호기심(intellectual curiosity)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최근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야 할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 이공계 대학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학생 3명이 올해 잇따라 목숨을 끊자 이의 원인과 대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무성하다. 조울증, 이성친구 문제 등 개인적인 문제를 들춰내기도 하지만 과도한 경쟁 구조, 공장식 인재 양성 등 현재 총장이 취임한 이후 단행된 시스템 변화에 비판의 초점이 집중되는 듯하다. 학교 측은 대책으로 심리 검사 및 상담, 체육활동 강화, 징벌적 수업료 제도 완화 등을 내놓았다는데 마치 ‘언 발에 오줌누기’식 방안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이젠하워의 시대는 냉전의 영향으로 대학이 정부 지원에 종속돼 갔다. 냉전 이후에는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경제라는 시대이념 하에서 대학이 기업의 자본에 종속돼왔다. 국가경쟁력을 키우고 기업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대학 역시 경쟁력을 갖추도록 요구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간은 자본주의 생산의 한 요소일 뿐이며 교육은 그 자원을 만드는 과정에 몰두한다. 생산의 영역에서 투입과 산출이 계산되듯 교육의 영역에서도 예측과 측정이 가능한 인간이 배출된다. 이제 교육은 한 인간의 영혼을 다듬기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기예에만 관심을 둔다. 이 속에서 인간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객체화돼 점점 자기 존재의 의미조차 망각해간다. 

남의 얘기만은 아닌 것 같다.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라는 학문공동체를 되돌아보게 된다. 밤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 기숙사 식당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는 걸까?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노력인가, 아니면 완벽한 부품이 되기 위한 몸부림인가.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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