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이 분다. 물방울 하나 어리지 않은 고요한 땅 위로 다만 들리는 것은 이따금 모래를 쓸어오는 바람 소리뿐이다. 행여 귓가를 스쳤던 바람이 아득한 저 길 끝으로 종적을 감추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는 침묵과 어쩐지 정체 모를 불안감이 남는다. 편혜영의 신작 소설집 『저녁의 구애』는 담담하다기보다 조금 더 버석거리는 목소리로 황량한 길 위에 놓인 일상을 그리고 있다.

편혜영이 보여주는 일상들이 황량함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인물들을 지독하게 옥죄어 오는 불감증(不感症)에 있다. 저자는 이번 소설집에서 전작 『사육장 쪽으로』와 『재와 빨강』에서 보여줬던 기괴하고 잔혹한 묘사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작중 인물들의 무미건조한 태도는 선혈이 낭자하는 공간만큼이나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일상이라는 삭막한 행성 속 감정을 잃은 인물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관성(慣性)이다.

표제작인 「저녁의 구애」는 오래 전 연락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임종을 기다리는 지인의 장례식을 위해 근조 화환을 부탁받은 ‘김’의 이야기다. 화원을 운영하는 ‘김’은 명절이면 의례적으로 선물을 보내는 관계인 그 어르신의 예정된 죽음에 애석해하는 자신을 못내 껄끄러워한다. 짐칸에 화환을 싣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장례식장에 거의 다다른 ‘김’은 지인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당혹감에 휩싸인 채 도시를 방황하며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도피를 시작한다. 죽지 않은 지인의 모습을 보고 계획하지 않았던 당황스러운 감정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한 ‘김’에게 이제 “어른의 죽음은 비통하고 엄숙한 세계를 떠나 정체되고 지연되는 시간의 문제로 남았다.”

어둠 속에서 돌진하다가 ‘김’을 발견하고 추락해 불길에 휩싸인 트럭을 보며 그는 뜬금없게도 헤어질 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왔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을 고백한다. 갑작스럽게 그의 삶으로 침습해온 ‘비일상적인 것’들에 혼란을 느낀 ‘김’에게 감정은 뿌리마저 남아있지 않은 껍데기로 존재한다. 그를 스치고 지나갔던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김’은 조등(弔燈)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일상 속 ‘관성 규칙’이 주는 강박감은 작중 인물들의 불감증을 조장한다. 이러한 관성은 작가가 2008년 『한국문학』 겨울호에 발표했던 「동일한 점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복사실에서 근무하는 ‘그’는 매일같이 정오가 되면 인문대 구내식당에서 대개 비슷한 반찬이 나오는 점심을 먹는다. 단조로운 그의 업무와 함께 숨 막힐 정도로 일률적인 그의 삶은 지하철에서 투신하는 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친 다음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사고 직후에도 ‘동일한 점심’을 위해 한사코 경찰 참고인 조사를 거부했던 그의 강박감과 더불어 지하철 투신자살 사고를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경찰들의 모습에서 흔들렸던 그의 ‘일상’ 또한 제자리를 찾는다. 하루가 지나고 그는 여전히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점심 식사를 한다.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에는 모두 어떤 종류의 불안함이 스며있다. 강박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행의 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는 짐짓 안정적으로 느껴졌던 일상의 건조함을 극히 절제된 수사로 표현하며 어쩌면 우리는 관성에 쫓겨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달려온 마라토너였을지도 모름을 넌지시 말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달리고 있었는가? 그리고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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