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정보문화학 전공에 ‘책의 미래’ 강의가 개설됐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 이재현 교수(언론정보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참여해 이번 학기까지 진행되는 이 강의의 주제에는 ‘전자책’이 포함돼 있다. 계간지 「세계의 문학」(2011년 봄호)에서도 ‘전자책 시대의 문학’이 특집으로 다뤄지는 등 전자책 단말기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전자책과 연관된 우리의 읽기·쓰기·사고방식 변화에 대한 담론이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중이다. 단순히 책을 보는 방식의 변화로 치부하기엔 부족해 보이는 이 전자책 열풍을 보는 이론과 개념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자책은 종이책의 디지털 버전?=이미 약 15~20년 전부터 수면 위로 부상한 ‘전자책(electronic book, e-book)’ 개념은 비교적 쉽게 우리 머릿속에 들어온다. 옥스퍼드 영영사전은 ‘인쇄된 활자를 디지털 매체에 재현시킨 책’으로 전자책을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문화학 전공의 ‘책의 미래’ 강의에 참여한 이정엽 강사(융합과학기술대학원)는 “사전에서 정의한 묵은 개념으로는 이미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전자책의 현재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전자책은 종이책을 기반으로 두고 있어야 하지만 현재 전자책에게는 종이책이라는 ‘쌍둥이’가 필요 없다. 현재 전자책은 초기와 달리 종이책의 속성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요소들을 구현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년 6월부터 아이패드용 잡지를 선보인 「와이어드(WIRED)」는 ‘하이퍼미디어(hypermedia)’라는 전자책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인쇄된 종이 매체에서 이미지와 문자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려고 시도했다면 하이퍼미디어는 영상, 음성, 이미지, 텍스트를 결합해 또 하나의 매체를 만들어 낸다. 이 강사는 “종이 잡지에 실린 인터뷰 기사는 사진과 활자에 의존해 한 인물을 나타내지만 「와이어드」에서는 영상과 음성이 함께 구현된다”고 말한다. 종이책을 닮기 위한 노력을 멈추고 자신만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전자책은 정보의 조직과 구성에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쇄책을 ‘재매개(remediation)’하며 불어닥친 전자책 바람=이러한 전자책 열풍을 단지 책 읽는 효용의 증대나 신기한 기기의 개발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미디어의 관점에서 전자책 현상을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여기에는 재매개(remediation)란 개념이 사용된다. 이재현 교수에 따르면 재매개란 “하나의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의 인터페이스, 표현양식, 사회적 위상과 인식을 차용하고, 나아가 개선하는 미디어 논리”다.

『재매개(뉴미디어 계보학)』의 공저자 데이비드 볼터는 이를 “새로운 미디어가 앞선 미디어 형식들을 개조하는 형식적인 논리”라고 불렀다. 이재현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재매개 현상은 비매개(immediacy)와 하이퍼매개(hypermediacy) 둘로 나뉠 수 있다”. 하이퍼매개란 새로운 매체적 특성을 구현해 메시지를 중개하는 전략이다. 아이패드 전용 잡지 「와이어드」 에서 나타나는 하이퍼미디어적 정보 구성과 전달 방식이 대표적인 하이퍼매개의 사례다. 기존의 매체였던 종이책과 달리 영상, 소리, 이미지 등 새로운 매체적 특성을 구현해 인간을 미디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면 비매개란 수용자가 매체의 존재감을 뚜렷이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메시지를 수용하게 만드는 전략을 의미한다. 신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전자책에서 기존 미디어를 개선하려는 재매개는 하이퍼매개로만 이루어질 듯 하지만 실제로는 비매개 역시 사용된다. 일부 업체는 오히려 인쇄 매체와의 유사성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엽 강사는 “미국에서 이미 상용화된 전자책 단말기 아마존 킨들(Kindle)은 비매개 전략을 이용해 종이책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전자책을 제공해 독자가 새로운 매체의 특징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종이책에 대한 향수를 지닌 이들은 전자책의 특성에 거부감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기존 미디어와의 유사성에 의존해 매체성을 감춘 것이다. 이같은 하이퍼매개와 비매개 전략의 양립 현상에는 새로운 매체의 특성 향유에 대한 욕망과 함께 종이책의 친숙성과 유사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돼 있다.

◇전자책 미디어, 제2의 구텐베르크 될까=이처럼 전자책의 열풍 이면에 숨은 미디어의 속성과 사람들의 상이한 욕망을 감안하면 전자책으로 우리의 독서 문화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민음사 장은수 대표는 “이전에 책을 구매하고 소비하기 위해 이용했던 서점이나 도서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였다”며 “전자책의 대두는 신기술이 생긴 것을 넘어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한 걸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주류 미디어는 인터넷”이라며 “TV, 음악 등 여러 미디어가 모두 인터넷으로 통합되고 있는 이 시점에 과연 ‘책’이라는 미디어도 통합될 수 있을지 그 향방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애플의 아이패드, 아마존의 킨들 등 하이퍼매개와 비매개라는 나름의 전략을 바탕으로 미디어를 재구성하려는 욕망이 전자책이라는 기술의 심층부에 자리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아직 전자책이 대중화되지 못한 상태다. 장은수 대표는 “한국에서 전자책이 이슈화된 것은 오래됐지만 결코 전자책 기술이 성숙된 상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전자책 한 권이 종이책의 반값에 가깝고 구글의 iBooks는 영어 고전 대다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전자책을 이용하는 것은 일부 ‘얼리어답터’에 한정된 얘기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출판문화진흥법’에 포함된 전자책 도서정가제 적용의 방향은 전자책 미디어 담론이 우리와 어느 정도 가까운지를 파악해 볼만한 사건이다. 이정엽 강사는 “아직 한국에서는 전자책의 보급보다 서점과 출판사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방향이 주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이퍼매개와 비매개라는 두 전략으로 뉴미디어 구현에 앞장서고 있는 전자책은 정말로 활판 인쇄술의 보급과 같은 또 하나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전자책이 제2의 구텐베르크가 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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