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예기치 않는 곳에서 심오한 성찰을 만날 때가 있다. 예컨대 서남표 KAIST 총장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 가운데 한 대목. 서남표 총장은 이렇게 썼다. “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많이 갖고 있겠지만 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며 그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

세 사람의 학생이 자살한 시점에서 바로 그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므로 이 문장을 보다 단정하게 요약해볼 수도 있겠다. “죽음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이 문장에서 애도를 결여한 도덕적 불성실성을 꼬집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외로 여기에 심오한 역설이 숨겨져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삶을 위해 죽음을 지불하다니, 그렇다면 죽음을 지불하고도 남는 삶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단순히 살아가는 것(생명)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일까? 

 발터 벤야민과 그의 주석가이기도 한 조르조 아감벤은 ‘생명’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인간적 ‘삶’을 분리해낸다. 인간의 삶은 생명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 의해 손상될 수 있는 그의 신체적 생명, 그 이상이다.

우리의 삶을 단순한 생명 그 자체로, ‘생존’으로 위축시키는 생명정치의 권력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인가를 몰아내는 것이다. 생명정치의 권력 안에 놓인 오늘날 우리의 삶이란 시장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고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다. 살아남기에 대한 한국의 부르주아적 번역어가 ‘스펙’이며 ‘웰빙’이다. 

 단순히 살아가는 것 이상의 삶을 요구하는 한에서 서남표 총장이 의도한 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가 쓴 문장은 카이스트 총장으로서 그가 추진해온 정책들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이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서남표 총장의 문장은 살아남기의 바깥에 남는 진짜 삶을 강조하고 그러한 삶의 피난처로서 대학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를 암시한다. 이제 남은 일은 서남표 총장이 자신의 문장을 이해하고 또 그 문장을 실천하는 것이다.

서남표 총장과 거의 같은 어휘를 쓰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을 추가하고 있는 폴란드 태생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는 것이 서남표 총장에게는 자신의 문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공짜는 없다」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이 거래에 반대하는 지급 거절 증서를/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이것은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항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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