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향 문화부장
「I am what I am」. 1980년대 초반 브로드웨이가 거품을 꺼뜨리며 주저앉을 때조차 크게 흥행한 뮤지컬 「새장 속의 광대(La Cage aux folles)」에 나오는 이 곡은 한 게이 가수가 장가가는 아들 앞에 엄마로 설 수 없음을 통분하며 가발을 벗어던지는 장면을 장식한다. ‘나는 그저 나일뿐’이라는 말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또 그 ‘나’라는 본질을 꼬이지 않게 ‘그저 나’로 정의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것은 비단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은 어디를 봐도 우스꽝스러운 가발을 둘러쓴 글들이 종종 눈에 띈다.  

 얼마전 법인화설립추진위원회의 일방적 구성에 반발한 노조와 학생들이 본부를 점거했다. 이 일을 지면에 올리며 일부 언론들이 선택한 단어는 ‘감금’, ‘하혈’ ‘감방(?)살이’였다. 사건 자체의 시시비비를 차치하고서라도 역사성을 띤 그 무거운 시간이 뒤집어 쓴 헝클어진 가발이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일만이 아니다. 각각의 언론들이 무슨 사건을 어떤 목소리로 조잘거리건 간에 요즘 포털에 오른 그네들의 표제는 눈에 거슬리기 그지없다. ‘초미니’, ‘노출사고’ 같이 볼품없는 내용이야 입에 담을 거리도 되지 않는다마는 염려할 대목은 따로 있다. 학생이 자살한 사건을 두고 모 상담원장이 주변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염려한 짧은 멘트가 ‘카이스트 학생들, 자살충동이 80∼300배로?’로 확대됐다. 실험용 경수로의 위험성을 제기한 기사는 ‘북한, 한국 공포로 몰아넣을 실험 중?’이라는 날카로운 외관이 돼 한시적이나마 등골을 서늘하게 스쳐지나갔다. 언론사들의 이 광대짓에 결국 NHN은 네이버 뉴스캐스트의 신규 제휴를 중단하는 등 선정적인 표제에 대한 강경책을 취해야했다.  

  문제의 원인은 수많은 텍스트를 표류하게 하며 언론사끼리 트래픽 경쟁을 하게 만든 인터넷 언론의 수익 구조에 있을까. 그런 경쟁 속에서 본질 위에 누더기를 뒤집어씌운 언론에 있을까. 사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니터 앞에 앉은 우리의 쉽고 단순한 클릭질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돌아가게 만든 것은 아닐는지. 부끄러운 것을 가려가며 읽고, 잘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되짚어내는 진중함은 어디에 갔을까. 모 언론이 슬픈 참사 앞에 붙인 ‘일본 침몰’이란 단어를 백번 욕하다가도 내가 그 글을 클릭했었는지 신문을 샀었는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본다. 혹 당신도 ‘사회’라는 새장을 엮은 손으로 ‘언론’이라는 그 광대를 손가락질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건을 그저 사건으로 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하여 그 사건의 본질을 왜곡되지 않게 그 사건 자체로 판단해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것은 비단 표제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표제로 시작한 작은 단상이 가볍게 겉만 훑고 판단해버리는 요즘 우리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염려하게 한다. 봄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꾸물거리는 4월, 우주전쟁 마냥 맞으면 쓰러질 것 같은 ‘방사능 비’라는 단어를 무심코 클릭하려다가도 지금 이 새장 속 광대들의 가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라고 하는데, 그 예의 없는 표제들을 두고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될 텍스트의 슬픈 운명’을 이해하려 하면 과한 것일런가. 혹은 그저 읽었을 뿐인 우리에게 표제들의 밥그릇 싸움을 뒤집어씌움은 천만부당한 일일런가. 낚아야하는 언론인이며 낚이고마는 독자로서 스스로를 패악질하려는 글 한편을 다시 훑으며 왠지 마음에 걸려 수십번이고 이 글의 본질을 고민하게 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가발을 벗길 방법에 대해 그 어느 누구라도 고민할 순간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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