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서평] 레이몽 부동,『사회변동과 사회학』

사회발전법칙이라는 전체주의?

요즘도 ‘사회변동론’을 들먹이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은 모호하기 그지없는 ‘세계화’, ‘지식정보사회’, ‘신자유주의’ 등은 현대 사회를 수식하는 어휘로 사용될 뿐이다. 대부분의 논의들이 미래를 예측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엄밀한 법칙성보다는 ‘당위’의 언명(言明)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생태사회로 가자, 복지국가로 가자는 수많은 주장들 한켠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과연 그게 실현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다. 정치의 시대였던 한국의 80년대, 대학가는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다. 사회변동론과 혁명이론을 소개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범람했다. 가령 사회구성체 논쟁은 사회 작동의 법칙에 대한 열띤 집단적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한 때의 강력한 흐름이 이렇듯 사라져버릴 수 있었을까?

레이몽 부동의 『사회변동과 사회학(1984)(원제:무질서의 위치)』은 80년대 이전 서구에 유행하던 사회변동 법칙 논의에 결정타를 날린 고전적인 사회학 저서다. 그는 사회과학자들이 ‘사회변동론’을 제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실제 일어난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라는 저 유명한 랑케의 “Wie es eigentlich gewesen”에 반대해 사회과학자들은 사회가 ‘법칙성’을 갖고 작동한다고 믿었으며 그 법칙을 찾고자 했다. 구조기능주의의 근대화이론이든, 맑스주의 혁명이론이든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상(社會像)을 고수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상이 실천적으로 수반하는 것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측’이었다. 그것은 현체제의 보수(保守)를 위해 활용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대안, 개혁, 혁명의 언어로 전화(轉化)될 수도 있는 도구였다.

부동은 이 같은 법칙추구적 사회변동론을 거부한다. 사회변동론의 법칙추구적 야망은 형이상학적 야망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사회를 인위적으로 개조하려다 억압적 질서를 낳는 전체주의로 정치화된다는 것이다. 부동은 제도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 가정하는 사회구조의 실체화로부터 벗어나기를 권고하며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제안한다. “모든 사회현상의 궁극적 원인은 개인의 행위와 믿음 또는 태도에 있다. 그리고 이 믿음과 행위의 원인은 개인이 행동을 하게 된 이유와 동기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 개인의 믿음과 행동의 원인은 그들이 그 행위에 부여하는 의미와 일치한다.”(75쪽) 우리가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수준은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층위까지이다. 그 이상의 실체적 구조를 독립변수로 보는 여러 사회변동론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부동은 기존 사회변동론인 근대화이론, 종속이론, 혁명이론, 빈곤의 악순환 이론 등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무너뜨린다. 칼 포퍼(Karl Popper) 식의 정교한 비판이야말로 이 책의 미덕이다. 예를 들어, 혁명은 한 사회의 궁핍이 극에 달했을 때 일어나는가?(일반적 혁명이론) 아니면 오히려 풍요의 시기 상대적 박탈감이 지배할 때 일어나는가?(데이비스의 J곡선이론) 경제적 궁핍과 풍요는 혁명에 대해 사실상 알려주는 것이 없다(202쪽). 결국 모든 사회변동은 실체화된 사회구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행위들의 결합효과 또는 구성효과로부터 온다. 이를 위해 칼 포퍼의 충실한 제자인 부동은 반증가능한 ‘형식적’, ‘가설-연역적 모델’에 따라 사회변동론을 재구성하자고 주장한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문제는 사회변동 법칙에 대한 거부가 개인의 자율성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동 이론의 ‘예기치 않은 결과’일지 모른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논리가 되는 동시에 결국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신고전경제학의 시조 하이예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이예크의 핵심은 사회의 인위적 구축을 반대하는 사회의 ‘자생적 질서’ 논리다. 자생적 질서는 미시적 요소들의 우연적 결합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질서를 상정한다. 유사 논리가 사회학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생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논리의 지배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제 전체주의에 억눌려오던 개인들은 세계화된 시장 안에서 (형식적으로는) 참 자유로워졌다. 많은 이들이 자유로워지다 못해 내버려지거나, 내팽개쳐진 삶을 살고 있다. 실로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은 자본뿐이다.

부동이 그것에 기여했든 그렇지 않든 사회변동론의 법칙 고수는 현재 난파한지 오래다. 그런데 사회변동론이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다시 랑케식의 ‘역사’가 지배적인 흐름이 된 듯하다. 과거 사실로 돌아가되 법칙에 대한 진술은 거부하는 포스트모던한 역사연구들을 떠올려보자. 역사해석이 상대적이고 다양하다면, 역사학이 최종적으로 근거할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연구대상인 ‘사료’이다. 탈근대 이후 역사의 범람은, 부동도 지적한 ‘경험주의’(425쪽), 사실을 수집하되 더 이상의 보편적 의미추출을 포기하는 ‘무법칙 사실주의’의 지배가 아닐까? 이때 역사란 더 이상 현재에 말을 걸지 않는 호사가의 게임과 비슷해진다. 역사의 지배와 나란히 놓인 것은 수학화된 모델이다. 이 책에서는 최근의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네트워크 이론이 시도하는 수학적 모델로 들어가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존 사회변동론 비판을 통해 수학적 모델로 나아갈 논리를 마련해준다. 추상화된 수학적 모델의 내부회로에서 순환하다보면 현실과의 연관관계를 상실할 수 있다. 수학은 역사와 달리 법칙성에 대한 환상을 제공하지만 그 법칙성은 ‘가상현실’에 머무르는 법칙들이다. 지금 사회과학은 역사와 수학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는 듯하다. 법칙에 대한 진술을 주저하면서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게 아닐까?

심지어 바디우, 아감벤, 지젝 등 때늦게 혁명을 요구하는 최근 정치철학자들의 작업들도 과거 사회변동론이 추구했던 혁명 발생의 조건을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주체’의 발생론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사회철학은 점점 사라지고, 정치철학만 남았다고 할까. 이들에게서도 구조의 속성은 ‘우연’의 마주침의 효과로 설명되고, 복잡한 우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난해한 철학적 사변이 동원된다. 하지만 자본에 의해 물질적 생산물 뿐 아니라, 심지어 문화, 지식, 감정에 이르는 모든 것이 화폐적 가치로 ‘동일화’돼 버리는 현 세계에서,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이야말로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전체주의적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사회변동 법칙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는 것은, 현실을 용인(容認)하는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슬라보예 지젝이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말한 대로 전체주의로 갈까봐 무서워 사회변혁 시도를 주저하는 행태는 이제 그만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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