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중문화비평 ‘왜’


「이태원 프리덤」의 중독성, 서태지 결혼설에 대한 충격,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나는 가수다」, 오랜 계보를 이어온 신데렐라풍 드라마까지. 우리 사회를 흔들어놓 은 사건들은 대부분 대중문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동안 우리는 쏟아져나오는 대중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슈가 된 네 가지 키워드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 ‘왜’ 일어났는지 분석해 본다.

① 음악 가사

② 연예인 우상화

③ 경쟁 프로그램

④ 신데렐라 드라마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고 부르짖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별의 아픔을 주옥같은 언어로 엮어낸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등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시에 비견될 만한 표현과 감성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려왔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최근의 노랫말을 들으면 웃음이 터져나온다. 어째서 대중들은 시시껄렁하다 못해 궁상맞기까지 한 노랫말에 매료되는 것일까.

비밀은 ‘웃음’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웃음을 관객들이 ‘못난 행동’ 즉, ‘바보들의 바보짓’을 보고 느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장난스러운 가사와 세련된 하우스 사운드가 특징인 UV의 「이태원 프리덤」에서는 이러한 웃음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요즘 심심할 땐 뭐해 따분할 땐 뭐해/어디서 시간때우나/강남 너무 사람 많아 홍대 사람 많아/신촌은 뭔가 부족해’라는 첫소절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이태원이 첨단의 문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물 간 이태원이 아닌 강남, 홍대, 신촌이 최근의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소위 보들레르의 ‘이빨달린 웃음’처럼 이태원을 비꼬는 듯한 반어적인 가사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허구적인 내용의 노랫말에 재미를 느낀 대중들이 터뜨리는 다음 웃음은 철지난 이태원처럼 언젠가 강남, 홍대, 신촌도 한물 갈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청소년은 대공원/노인들은 양로원/아이들은 유치원/우리들은 이태원’이라는 가사는 이태원을 우리 주변의 자리에 나란히 놓는다. 대중은 「이태원 프리덤」을 통해 문화를 향유하는 것인 양 으스대는 이들 또한 시간이 흐르며 그 콧대가 점차 낮아질 것이라고 유추하며 그 ‘바보같은 댄디즘’에 폭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웃음을 한 번 더 되짚어보면 더없이 슬퍼지는 때가 있다. 웃음이 비극성을 띠는 때는 바로 그 이빨이 자신을 향할 때다. 「이태원 프리덤」의 웃음이 타인에 대한 조롱에서 시작된다면 불나방스타쏘세지 클럽의 「알엔비」는 눈물 섞인 웃음을 짓게 하는 요소를 갖고 있다. 한 인디밴드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쓸데없는 개멋에 취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기타 메고 폼잡지’도 ‘미련하게 청춘을 소모하지’도 ‘비호감적인 음악을 하지’도 않고 그녀에게 여자들이 좋아하는 알앤비나 들려주려 한다. 이 「알엔비」는 잔잔한 발라드 곡이지만 노랫말을 읊는 창법에서 묻어나는 과장된 진지함은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향한 자조적 웃음은 깔깔하기 그지없다.

현상을 비꼬며 풍자적인 웃음을 만들건 눈물 섞인 웃음을 자아내건 어쨌든 요즘 유행하는 몇몇 곡들의 노랫말은 물린 자국이 아리도록 웃기다. 앙리 베르그손은 「희극」에서 비극이 희극으로 탈바꿈 되는 순간은 심각함에 찬물을 끼얹을 때, 상황에 감정이입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무심한 방관자로 삶에 임할 때라고 말한다. 이 음악들은 그런식으로 우리에게 거창하지 않고 너절한 삶조차 받아들이도록 하는 ‘건강한 웃음’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10cm의 「아메리카노」를 듣는다. ‘사글세 내고 돈 없을 때’, ‘여자친구와 싸우고서 바람 필 때’조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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