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도로, 색색으로 칠한 건물들, 담벼락에 요란하게 쓰인 대통령 선거 선전 문구까지, 그야말로 정신없는 남미 일정의 첫날. 콜롬비아의 보고타를 경유해 도착한 페루의 수도 리마는 지금껏 활동해온 북아메리카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두달간 영어로만 이야기한 우리들은 어조나 억양까지 완전히 다른 스페인어에 기가 죽어 숙소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한국과 먼 곳인만큼 이곳 페루에는 한국인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120년에 달하는 이민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인들과 후지모리 대통령을 당선시키며 페루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인들과 달리 한국인의 페루 이민 역사는 30년에 불과하다. 덕분에 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골목에서 공을 차던 어린 아이들은 우리를 가리키며 중국인을 뜻하는 ‘치노(Chino)’나 일본을 뜻하는 ‘하뽄(Japon)’이라 수군댄다.

그러나 짧은 이민 역사가 무색하게 한국인과 한국 문화는 페루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한류 열풍은 중국과 일본 등 한국과 인접한 국가들뿐 아니라 이곳에까지 닿아있었다. 아이돌과 K-pop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잘 아는 현지인들은 동양인 특유의 작은 눈과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보니따(예쁘다)!”를 연발했다. 현지에서 만난 교민 분은 이런 현상의 원인에 “한국은 남미를 식민지화한 유럽이나 현재 남미에 정치·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미국과 달리 다른 국가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 유일한 선진국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30일(토)에는 리마의 한글학교에서 독도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리마의 한인사회에서는 매주 토요일에 리마 국제공항 근처의 학교 건물을 빌려 한글학교를 여는데 이날은 유치원부, 초등부, 중고등부와 학부모를 포함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교민이나 기업에서 보낸 주재원들의 자녀다. 현지인 못지않게 새까맣게 탄 얼굴이지만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영락없이 한국인이다. 

이날의 행사는 독도 이야기보다 교민들의 한글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보다 영어를 가르치려는 북미에 비해 이곳에서는 모국어를 가르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들은 가정에서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주말에 한글학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한국과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는 일등 공신이다.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한국어 구사능력이 깜짝 놀랄 만큼 수준급인 것도 이 덕분이다. 어쩌면 짧은 역사에도 급격히 성장하는 페루 한인 사회의 원동력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교민들의 모국 사랑에 있는지 모른다.

김은열 『대학신문』 객원기자 (사회교육과·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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