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여배우들.” 영화 「여배우들」에 나오는 대사다. 그만큼 여배우는 어딘가 특별하다. 왠지 먼데 있을 것 같고 항상 반짝일 것만 같은 그들을 우리는 여배우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 한 여배우가 이러한 통념을 깨는 무대에 등장했다.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발칙한 이름의 지지자들과 함께하는 그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밑반찬을 싸들고 나타나더니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부산 영도 투쟁 현장에 지지방문을 한다.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현장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들어서면 우린 안전할까요?”라는 트윗을 날리기도 하고 MBC 「백분토론」에 출연해 “대기업 따위가 어떻게 20대의 꿈이 될 수 있냐”는 다소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던지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 문제가 되는 지점, 관심이 필요한 곳에 나타나 유쾌하게 내야할 목소리를 내는 이 여배우의 이름은 김여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그를 만났다.

인터뷰|이소영 편집장     글|김미연 부편집장     사진|신동호 사진부장     삽화|김태욱 기자

 

여대생,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다

2011년 한국 사회의 ‘현장’ 곳곳에 등장하는 김여진씨가 이런 활동들을 시작하게 된 배경, 그의 역사가 궁금했다. “치열하게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는 자신의 대학생활을 이렇게 정리했다. 딸 셋인 집에서 태어나 여중-여고를 거쳤던 당찬 여학생 김여진씨는 깊이있는 학문에 대한 열망을 품고 대학에 진학했다. “원래 이과였는데 계열을 바꿔서 독문학으로 전공을 정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과 똑같은걸 가르쳐서 너무 재미가 없는거에요. 많이 실망했죠.(웃음)” 전공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학교 밖의 현실은 크게 다가왔다. “1991년, 강경대 열사 사망 이후 충격을 받아 추모집회를 나갔던게 처음이었고 그 이후 제게는 경찰의 폭력성, 언론의 왜곡보도 등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어요.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말도 안되는 곳이더라구요.” 사회의 각종 부조리함에 눈을 뜬 김여진씨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학생 운동의 일선에 뛰어들었다. “각종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 다양한 연대활동을 하는 강경한 학생조직에 소속돼 운동을 했어요.”
평범한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은 없었을까? “90년대 초반 학번인 우리 때는 굉장히 대학문화가 혼재돼 있었어요. 학교 밖에서 연대 활동을 하다가 학교로 돌아오면 정말 다른 분위기였고 그 가운데서 큰 괴리감과 혼란을 느꼈죠. 그럼에도 그렇게 활동하고 사람들을 알아가는게 참 좋았어요”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추억으로 그는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같이 운동했던 동지와 열렬히 연애했어요. 운동하면서 하는 연애에는 장애물이 많죠. 수배되고, 기다리고, 접선하듯 만나고, 그런 것들을 그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요? 그런 기억들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죠. 나를 형성해주는 공부가 됐던 것 같아요”


여배우, 무대를 전환하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했던 그는 4학년이 되면서 학생운동을 그만뒀다. “주력했던 청량1동 철거반대 운동이 해결된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어요. 그 해결 과정에서 사람들의 이권다툼을 직접 목격하고 책에서 읽었던 ‘민중들의 건강성’, 그런 것들과 큰 괴리감을 느꼈죠. 굉장히 지쳤고 다 그만두고 나와서 쉬고 싶었어요.” 그렇게 운동을 그만둔 김여진씨는 모든 것을 ‘버리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소리높여 무엇인가를 외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보냈던 그 시간들을 그는 “슬프고 외롭고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시간으로 회상했다. 책 읽고 영화보고 음악을 듣던 그 시간동안 그는 “평생 자유롭고 가난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취직은 안되겠고 대학원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 때 읽었던 책에 중산층 여인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면서 허위적인 생각, 두려움을 모두 떨쳐내면서 ‘화장실 청소하면서 살지!’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 대사를 읽는 순간 ‘아 이거다. 나도 그렇게 하지 뭐’ 싶더라구요. 시원한 느낌이었죠.” 이후 김여진씨는 우연히 보게된 연극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반해 극단에 들어가 무작정 포스터를 붙이는 삶을 시작했다.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힘들고 궁상맞지 않았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스스로 결심을 확고히 하면 충분히 떨쳐낼 수 있어요.”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진심을 다해 연기해오던 김씨는 올해 초, 홍익대 청소노동자 투쟁에 지지의 목소리를 내며 ‘소셜테이너’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홍익대 투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로 뜻밖에도 김여진씨는 ‘연기했던 경험’을 꼽았다. “연극 「엄마를 부탁해」와 영화 「아이들」에 출연하면서 어머니, 늘 있기에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트위터’를 통해 현실로 불쑥 튀어나왔다. “트위터로 시시각각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을 보고 들으면서 어느날 툭,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소셜테이너 김여진’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밑반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가지를 싸갔어요. 특별한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죠. 그런데 어머님들이 너무 좋아하시고 반향이 크니까 계속하게 된 거에요.”
이렇듯 학생운동가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소셜테이너로 활동 무대를 전환해오는 것이 개인적으로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무엇이 더 우선하는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랬을 때 누군가 나와 함께 해주길 바란다면 가만히 있으면 안돼죠. 일어나서 뭔가를 해야해요.” 그는 연기자로서 불이익도 거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득이죠. 사람들이 더 좋아해주고 더 많이 찾아줘요. 스타? 예나 지금이나 스타가 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길거리에서라도 연기하면 되죠. 부담은 없어요. (웃음)”


날라리 외부세력이 되다

아무런 기획도 계획도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진 그의 활동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임이 자발적으로 결성됐다.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을 달고. 어쩐지 불온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유쾌한 것 같기도 한 이 이름의 의미를 물었다.
‘외부세력’이라는 표현은 홍익대 청소노동자 점거농성 당시 처음 사용됐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월 75만원, 하루 300원의 식대를 받는 열악한 처우에 반발해 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은 집단해고를 통보받는다. 이에 반발해 집단농성을 벌이는 현장에서 홍익대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외부세력은 학교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김여진씨를 포함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럼 진짜 외부세력이 돼볼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날라리 외부세력에 참여하는 분들은 ‘운동한다’고 하면 부담을 느끼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주체세력이 하지 않는, 외부세력이 하는 일들을 하는거죠.” 그들은 그 일들을 유쾌하게, 신나게 해나간다. 날라리처럼. “그래서 갑자기 떠오른 이름이에요. ‘날라리 외부세력’. 이런 식으로 활동을 해야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날라리 외부세력의 활동이 이렇게 독특한 형태로 전개되는 데는 김씨가 느낀 ‘요새 운동’에 대한 답답함도 한몫한 것으로 보였다. “시간이 2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요새 운동들은 과거와 변한게 없어요.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다양해야할 사람들이 아직도 틀에 갇혀 있죠. 특히 더 발랄해야할 학생운동이 제가 대학생일 때랑 너무 비슷해서 충격을 받았어요. 이쪽저쪽 넘나들고 직접 부딪쳐가며 공부하는게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친 채 그냥 따라가고 있더라구요. 아직도.”
그렇다면 날라리 외부세력의 활동과 지금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다를까? “비교할 수 없는 문제죠. 날라리 외부세력은 말 그대로 ‘외부세력’이니까요.” 하지만 날라리 외부세력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열정과 확신이 가득했다. “물론 아직은 날라리 외부세력이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외곽세력이지만 이들이 언젠가는 주체세력이 될 것이라고 봐요.” 김씨가 언급한 ‘주체세력’이 본격적인 사회운동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관심있는 개별 이슈에 목소리를 내는 ‘날라리 외부세력류’의 활동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갖는 막연한 불안함을 실체화시켜 이들을 변화의 능동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변화을 촉발시킬 운동의 지향점은 창의성에 방점이 찍혀있어야 한다는 것이 김여진씨의 의견이다. “운동은 가장 창의적이어야 해요. 돈의 힘으로 포장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싶은 아름다운 세상의 꿈과 이상을 지금, 여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운동이 돼야 한다는거죠.”
이러한 날라리 외부세력들의 창의적인 운동을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으로 조직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이같은 질문에 그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조직되지 않아야해요. 느슨하게! 자발적으로! 요즘 저는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아요. 각자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추진하죠.” 가벼운 듯 가볍지 않은 날라리 외부세력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 어떤 강요도 조직도 없지만 변화는 놀랍다. “꿈에도 운동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변하더라구요. 날라리 외부세력을 통해 만난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기타칠 사람을 구하고 노래할 사람을 구해 ‘날라리 밴드’를 조직해서 공연을 하거나 현장에서 찍은 사진들로 사진전을 기획해요. 한사람 한사람의 변화들이 대단히 급격하게, 가시적으로 보입니다.”


누구에게나 화를 내고 난 뒤 급격한 감정적 소모를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노와 싸움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지치게 만든다. 투쟁과 그에 대한 지지도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와 싸움의 한 형태라면 이런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까?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그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직접 가서 보는거죠.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아는 사람, 친구가 되면 그들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해져요.” 덧붙여 김씨는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릴 것을 강조했다. 이기려는 순간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커지기 때문에 ‘이겨야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분들의 싸움이 끝나는 순간까지, 끝까지 그 옆에 같이 있겠다,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단순히 지치지 않고 옆에 있겠다고 생각하면 돼요.” 지치지 않는 방법으로 김씨는 ‘재미있고 의미있는’ 운동을 강조했다. “운동은 재미있어야 해요. 재미만 있으면 쾌감이 되니까 곤란하고 ‘의미’도 있어야하죠. 재미있고 의미있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에요. 날라리 외부세력들이 활동을 계속하는 것도 이 행복감을 느꼈기 때문이죠.”
한편 김여진씨의 마음을 처음으로 움직인 계기였던 트위터는 날라리 외부세력의 활동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 “활동하면서 트위터의 힘을 제대로 느끼고 있어요. 트위터를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더라구요.(웃음)” 트위터를 활용해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그인만큼 트위터에 대해 보다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김씨는 트위터가 ‘마음에 닿아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트위터의 힘은 확실히 엄청나요. 그 트위터의 엄청난 힘은 개개인의 소통, 사람간의 소통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여기서 뭔가를 선동하려고 하면 들킬 수밖에 없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고 다른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여 그 마음에 가서 닿아야해요.”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향해

이같은 활동을 통해 김여진씨는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해야한다고 생각할까? “개인의 마음이 불안하지 않은 사회가 돼야한다고 봐요.”  이어 그는 한국사회가 이런 사회가 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노동문제’를 첫 손에 꼽았다. “지금 노동시장은 너무 왜곡돼있어요. 중소기업이 없고 온통 대기업뿐인데 이 대기업들이 일은 다 하청을 주고 노동자는 비정규직화하죠.” 이어 그는 “사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는 다 연결돼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다 비정규직화 돼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우선 출산율이 점점 더 낮아지게 될거에요. 교육문제도 악순환의 고리를 깨지 못할 것이고 안보불안도 보다 더 심각해지겠죠.”
김여진씨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정치인, 권력자에게 맡겨놓아서는 안되며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단언한다. “국민들이 직접 연대해서 복지든 노동권이든 하나씩 다 쟁취해내야 해요. 그 쟁취의 수단이 되는게 바로 투표죠.” 그는 실제로 트위터를 통해 적극적으로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누구에게 표를 던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스스로가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게 중요하죠. 그래야 ‘머슴’인 정치인들이 누가 주인인지를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시민의식, 주인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두려워할 것은 가난이 아냐

한국사회를 정상궤도로 돌려놓을 방법으로 국민들이 정치적 실존을 자각하는 것을 꼽은 김여진씨는 국민 가운데서도 특히 20대에게 “사회에 관심을 좀 가져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경쟁에서 이겨라, 이겨서 상위 1%에 속해라’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사회에 순응해 남들이 하라는대로 따라가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김씨의 조언이다. “지금 20대들은 끝이 뭔지도 모르고 냅다 뛰고 있어요. 남의 고통에 귀막고 눈감고 고립돼있으면 그 끝은 결국 죽음이에요. 정신을 차리고 지금 자신이,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봤으면 좋겠어요.”
그는 20대에게 질문을 던진다. “행복해지고 싶나요, 행복해 ‘보이고’ 싶나요? 부와 명예를 갖는다고 행복해지지 않아요. 올라가고나면 떨어질 일밖에 없죠.” 이어 김씨는 우리가 가진 ‘가난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적했다. “결국 가난해지는게 두려운거죠. 가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취업에 전전긍긍하게 되고 모든 일이 불안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제 경험에서처럼 가난은 정말 별거 아니에요. ‘내가 뭘하고 싶고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 확실하게 알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요. 먼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그게 바로 경쟁력이라고 봐요.”

 

“제가 올해 딱 마흔이에요. 마흔이 되고나니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 확장된 느낌이랄까.” 어떤 질문에든 솔직하고 자신있게 이야기하는 김여진씨를 보면서 떠올렸던 단어는 단연 ‘뚜렷함’이었다. 우리는 가난해질까봐 불안하고 실패할까봐 불안하다. 불안이 범람하는 시대이기에, 그렇기에 그의 뚜렷한 신념은 반짝이는 별과 같아보였다. 스타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던 그였지만 그 뚜렷함이 바른 곳을 향해있다는 점에서, 직접 실천에 옮긴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실천이 행복하다는 점에서 ‘김여진’이라는 이름의 별은 누구보다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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