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6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프랑스 예술원 콩쿠르 입상자를 이탈리아로 유학 보내며 거주공간과 장학금을 수여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작곡가 모리스 라벨, 화가 자크 다비드 등도 이 제도의 수혜자였다. 오늘날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이 제도와 궤를 같이한다. 레지던스, 혹은 창작 스튜디오라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창작 장소를 필요로 하는 예술가에게 거주할 수 있는 작업실을 제공하는 제도를 말한다. 1995년 폐교를 재활용한 청원미동창작마을 건설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이후에도 활발히 진행돼 현재 국공립 레지던스의 수만 해도 50여개에 달한다. 오늘날 레지던스는 수적인 팽창뿐 아니라 미흡한 공간 설계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적인 도약을 앞두고 있다. 창작 공간 그 이상의 공간으로 발돋움하는 국내 레지던스를 살펴보자.


레지던스, 국제 교류에 발을 내딛다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간의 소통을 도모한다. 경기창작센터, 고양창작스튜디오와 같은 유수의 레지던스들은 외국의 레지던스에 예술가들을 유학시키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산하의 창동창작스튜디오 역시 2005년부터 ‘국제교환 입주프로그램’으로 뉴질랜드,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에 작가들을 파견하고 있다. 사진작가 이중근씨는 지난 2007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 갤러리 설치작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귀국 후 전시회에서 그가 선보인 작품 「Super Nature」는 계단면에 사진을 입힌 독특한 설치예술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정선의 「금강전도」 위에 이국적인 뉴질랜드의 풍경을 컴퓨터 기술로 오버랩했다. 이중근 작가는 “외국의 선진화된 기술과 형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을 뿐 아니라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작품에 새로움을 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프로그램의 의의를 밝혔다.

이중근 작가가 해외에 파견된 것처럼 여러 외국 작가들 역시 국내 레지던스에 입주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독일 화가 패트리시아 토마는 지난해 ‘해외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과 ‘해외 공동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가들의 국제 교류를 지원하는 금천예술공장의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 「Stories from Seoul, Korea」는 익숙한 동네 골목을 보는 것 같다. 그림에는 짐을 가득 머리에 인 채 힘겹게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으려하는 아주머니도 있고 정육점에 거꾸로 매달린 돼지들도 보인다. 레지던스가 위치한 독산동 지역을 찬찬히 돌아다니며 우리네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려 한 작가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듯 레지던스 입주 작가들은 국제 교류 프로그램에서 겪은 새로운 경험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작품세계의 폭을 한층 더 넓히고 있다.


지역민의 품에 안긴 예술 공간


한편 지방자치단체들이 레지던스 설립에 참여함에 따라 레지던스를 지역의 예술 공간으로 만들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예술가만을 위한 공간에서 나아가 지역민과 교감하려는 레지던스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신당역 근처 중앙시장의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길은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아기자기하다. 무엇을 파는 곳일까 호기심이 동해 지하로 내려가면 일러스트, 도자, 금속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공방이 죽 늘어서있다. 신당지하쇼핑센터를 개보수해 만든 신당창작아케이드는 작품 관람을 위해 통로 한켠에 마련된 이색 쉼터에서도 알 수 있듯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가득하다. 발렌타인데이 기념 수공예 교실, 봄맞이 경매와 같은 깜짝 이벤트뿐 아니라 매주 토요일 오후 1시엔 입주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무료 체험 공방이 열린다. 레지던스를 시장처럼 누구나 부담없이 친숙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노력이 인상깊다.

경기도 화성시 수화동 일대는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한적하고 조용한 여느 농촌 마을이다. 그런데 2001년 폐교를 재활용 한 창문아트센터가 설립된 이후 마을엔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마을 전체를 전시 공간으로 삼은 입주 작가들 덕에 동네 곳곳에서는 조각상과 같은 예술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매년 추수철이 되면 형형색색의 허수아비 작품들을 쭉 늘어뜨린 허수아비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매년 가을에는 센터 내 작업실을 개방하는 오픈스튜디오 전시를 열어 지역민의 문화 예술 관람 기회를 높이고 있다. “문화의 향유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농촌 지역민들에게 예술을 제공하고 마을 대소사에도 참여하며 그들과 하나 되고 싶다”는 박석윤 창문아트센터장의 말처럼 레지던스는 지역민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장르의 저변을 넓혀가는 레지던스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다른 분야의 여러 예술가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러한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장르간 융합이나 새로운 소재의 사용 등을 통해 장르의 저변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높아지고 있다.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 산하 세라믹창작센터는 국내 유일의 도자 전문 레지던스다. 센터에는 도예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 회화, 조각 등의 여러 시각 예술 분야의 작가들이 입주하고 있다. 이 레지던스는 개인 작업실에 구비하기 힘든 대규모 가마 시설을 제공하는 동시에 정기 학술 세미나, 전시 등을 통해 작가들이 자신의 분야에 도자 작업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지난해 말 개최된 레지던스 평가전 「A.I.R.」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실험적 결과물의 응집체였다. 공예가 최윤정씨의 「날개가 되고 싶은 깃털」은 지점토에 유리가루를 섞어 한올 한올 날아갈 듯한 깃털의 모양을 공중에 매달아 표현했다. 세라믹창작센터가 그리는 도자의 비상이 기대된다.

이렇듯 국내 레지던스는 각자의 특성을 살려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신의 교수(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는 “레지던스는 예술가들의 창작에 필요한 경험과 문화적 체험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며 “앞으로도 제도적으로 창작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 다각적으로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태동을 넘어 비상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레지던스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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