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5월이 찾아왔습니다만 이제 ‘5월‘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쓰다가 포기하곤 하던 편지를 당신에게 드리는 일도 이제는 영영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5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치사상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올 봄의 새로운 정치 지형 속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은 그 무엇이 있음을 보고, 이 글을 쓸 용기를 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항쟁에서 민주시민 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당신은 임철우의 소설 <봄날>에 윤상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그 윤상현은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똑똑히 깨달은 바로 그 순간, 절대 고독 속에서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서울이여! 부산, 대전, 인천, 대구여! 당신들이 달려와 주기를 우리는 기다렸다…그런데, 당신들은 끝끝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왜 이 도시를 잊어버렸는가.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당신들의 잠자리는 평안한가.“ 당신은 그 날 함께 죽지 못했던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개인적으로 이 물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간 세력의 후예들이 다시 그 때와 다름없이 영남지역의 국회의석을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한 선거결과를 놓고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라고 다시 묻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남 출신인데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는 신군부의 계엄령이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영등포 역에서 항의집회를 가지기로 했다는 동료들의 전언에 따라 역으로 나갔었습니다. 대학생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거나 하나 둘씩 배회하다가 계엄군에게 잡혀 가더군요. 나는 천진난만한 데이트족처럼 보이기 위해 동료 남학생을 전화로 불러내 그와 함께 역 부근에서 이야기하다가 저녁 무렵 아주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치지도자, 학생운동 및 재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된 당시 상황에서, 서울에서는 이렇다 할 유혈충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즉 우리의 수도에서는, 계엄령에 항의하는 군중이 조금씩이나마 모여 들고 있었음에도 광주에서와 같은 격렬한 저항을 유도할 만한 계엄군의 의도적 도발 행위는 없었던 것입니다. 부산, 대전, 인천, 대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영남에 지역적 근거를 둔 신군부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호남지역을 고립시켜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신군부의 전술 속에서, 그리고 진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의도하지도 않은 채 당신들에 대한 가해의 방관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난 역사에 대한 사죄와 참회 있어야 새로운 정치 탄생 가능할 것

 

 

 

그러고나서 24년, 신군부와 그 추종자들의 권력을 계승한 정당은 탄핵국면으로 고사 지경에 빠진 듯이 보이다가, 박정희 향수와 맹목적 영남지역주의를 자극한 데 힘입어 기사회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건전보수를 외치며 새로운 세력으로 태어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5월에 죽어갔던 당신과 당신의 동지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 없이,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저질렀던 죄업에 대한 공개적 참회 없이, 다시 말해또 하나의 역사청산 없이 새로운 탄생이 과연 가능할까요? 진정한 사죄 없이 진정한 화해가, 영남 지역주의의 진정한 극복이 과연 가능할까요?

 

 

 

 

당신에게 사죄합니다. 우리는 그때 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신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한 채 당신들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우리의 잘못을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를 아주 내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 순간, 당신은 무덤 속에서 다시 한번 절대 고독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디 편히 잠드십시오. 아니, 원한다면 잠들지 마십시오. 이 땅 위에 빛나는, 결코 잠들지 않는 별이 되십시오.

 

한정숙

 

인문대 교수․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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