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를 살만한 표현은 남의 입을 빌리자. 얌전하게만 뵈는 루시드폴이 ‘미선이’로 활동하던 시절 이런 노래도 만들었다. ‘다시 진달래 피네. 개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진달래타이머」 中). 그런 세상에 그런 봄이 왔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겨울 끝에 전해졌던 한 시나리오 작가의 부고가 아직 내게는 선연하다. 극작과 연출을 공부하는 여자친구를 뒀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잠깐 구성작가 생활을 했던 내게, 그녀는 한 두 다리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었다. 더욱 직접적으로, 여자친구가 이 달에 3년여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전까지 나는 아직 겨울을 다 나지 못한 기분이다. 지진이 일상화된 나라라 우리로선 영 낯선 경우를 당한 게 아니었는데도 마침 여행 중이었던 친구는 흔들리는 빌딩 안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껴야했고 친구와의 연락이 여의치 않은 가운데 나는 잇따르는 여진과 원전 관련 뉴스에 며칠을  날 선 신경으로 초조해야 했다. 물론 나름의 곡절을 거친 우리 커플의 연애사야 이제 곧 재회를 앞두고 있다지만 영영 지난 겨울 속에 묻힌 이들의 스러진 자리가 못내 맘에 밟힌다.

계절의 바뀜이 생명 놓인 자리의 바뀜이 된 사정이 기실 사람에게만 있진 않다. 소와 돼지를 합한 도합 347만두라는 숫자는 필시 이 전공에서 생업을 구하게 될 내게 무슨 원죄처럼 무겁게 다가온다. 누군가는 영국의 농림부를 숫제 ‘환경식품농촌부(Department of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로 변모케 한 2001년 영국 구제역 사태 시 살처분되었던 646만두보다는 적은 수치라 강변하지만 끝내 살처분만 고수한 영국과 달리 백신접종까지 단행한 결과가 저만한 수치였음이 중요하다. 게다가 영국의 면적이 대한민국 면적의 두 배 이상이라는 점과 당시 살처분 가축의 80%인 525만두가 주로 양모 생산을 위해 사육된 양이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욱 가까이에서, 더욱 밀접한 가축들의 통곡을 외면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매 영상산업인력 정책, 지진 대처 및 원전 정책, 그리고 축산 정책을 개선하고 재검토하기 위한 논의가 홍수를 이루지만 급조되는 정책이 무엇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나는 회의한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히려 어떤 형태로든 시장 속에 있는 우리가 직접 행할 일이 아닐까. 개개인 선호의 총합이 시그널로 작용하는 체계인 시장은 달리 보면 모두의 선호 위에 고루 얹힌 책임의 장일 수도 있을 터, 우린 얼마나 작은 영화에 귀기울여봤는지, 현재의 발전 설비로 넉넉할 만큼 전기를 아꼈는지, 이 땅에서 동물복지형 축산이 가능할 수준까지만 고기를 적당히 탐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너무 많은 죽음들을 딛고 마주하는 4월. 계절은 무심히 절로 오고 가더라도 우리 삶 속의 냉기와 온기는 각별한 노력 없이는 쉬이 물러갈 수도, 다가올 수도 없는 것이다. 살랑살랑 봄바람 불어오고 묻힌 이들이 묻는다. 당신에게는 글 쓰거나 영화판을 기웃대는 순한 친구 하나쯤 없는가. 지금 무심코 꽂아둔 덩그런 가전 하나쯤 없는가. 수일 내에 삼겹살 회식 가질 취기 오르는 약속 하나쯤 없는가.

그러니 다시 한번 루시드폴의 입을 빌려, ‘겨우내 움을 틔우듯 돋아난 사랑’(「봄눈 」中)을 그린다. 진실로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로써 새로운 셈법을 꿈꾸자. 피어난 꽃보다 더 많은 피지 못한 꽃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남은 이들의 남은 삶으로. 계절을 견디고 돋아난 - 사랑이라 부르든, 슬픔이라, 기억이라 부르든 - 바로 그 무엇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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