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적인 현실이
무관심에 대한 변명될 수 없어
오늘의 민주주의 기틀을 다진
광주 5·18 정신 기억해야

김미연 부편집장
미친년. 지난 18일 소셜테이너 김여진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전두환 전 대통령을 언급하며 “당신은 학살자입니다”라는 내용을 게재한 것에 한나라당 정책위원회 ‘전’ 자문위원이 남긴 댓글이다. 대통령은 3년 연속 광주를 찾지 않았고 국회의장 역시 5월 18일, 광주가 아닌 서울에서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일년중 그 어느날보다 기억돼야 할 그날은 여전히 이렇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못생겼으면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초등학교 저학년들의 다툼에서나 들을법한 말을 하는 한나라당 아저씨의 호통을 비웃기 전에 정작 우리는 5월 18일, 그날에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장터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것이 대학생의 낭만”이라고 외치고 집에 돌아가 드라마를 챙겨보며 현실성 없는, 그래서 더 멋진 남자주인공에 황홀해하지는 않았는가. 모두가 봄과 여름 사이의 터질듯한 초록빛에 어지러워하는 가운데 아무도 1980년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곳, 광주를 향한 순례단의 포스터는 장터와 일일호프를 알리는 요란한 포스터들로 조용히 뒤덮혔다. 기정사실화된 대학생들의 탈정치화는 또 말하기 입 아플정도다. 비판이 많았기에 변명도 탄탄하다. 이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20대는 정부와 사회의 부조리함 하나하나에 날선 비판을 계속하기가 버겁다. 분노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스포츠와 예능, 드라마를 챙겨본다. 내려갈 팀은 내려가는 야구지만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행복하다. 「무한도전」을 보며 신나게 웃고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가수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노래에 감동한다. 그 행복과 웃음, 감동은 경쟁에 지치고 비교에 다친 우리를 잠시나마 위로해준다.

하지만 역시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버겁다고 탈정치화와 무관심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정치적이고 참여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20대로서 사회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상식의 문제다. 무관심을 정당화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정치’들을 피할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5·18이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는 주장을 그냥 모른척할 때 민주주의는 한걸음 퇴보한다. 민주주의 퇴보로 인한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우리다.

이 글에서 “5월 18일에는 하루종일 민주화 열사들을 생각하며 숙연해야 한다”거나 “자 그러니까 정치에 참여합시다! 거리로 나갑시다!”고 외칠 생각은 없다. 아니, 그렇게 외칠 수 없다. 학보사 부편집장이라는 직책이 부끄럽게도 나 역시 앞서 언급했던 20대들과 별반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다만 할 수 있는 말은 우선 “기억하자” 정도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9-로 시작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하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먼저 떠올리는 대학생들이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18을 아예 잊어버린다면, 그리고 그 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지함’의 측면에서 김여진씨에게 폭언을 퍼부은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우선, 기억하자. 기억은 실천의 또다른 얼굴이다. 잊지 않아야 5·18 정신과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할 수 있고 그 고민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 기억하는 것, 바로 그것이 31년 전, 5월의 광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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