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김숨

수도 계량기 속을 가득 메운 죽은 귀뚜라미 떼(「간과 쓸개」)와 목 매달려 비참하게 죽는 개들(「투견」)처럼 섬뜩한 소재들로 얽어지는 잔혹한 분위기 속에 얼핏 작가 김숨이 현실을 바라보는 염세적인 시선이 포함돼있는 것 같다. 밧줄 하나 던져지지 않은 불행의 구덩이에서 병들어 누워있는 그의 인물들은 구출될 수 있을까? 광화문 어느 카페의 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오는 김숨을 맞았다.

사진: 남상혁 기자 as0324@snu.kr

‘식물성의 비명’을 대신하는 목소리

김숨은 그가 자신을 위해 지은 이름이다. “김수진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그 이름으로 불릴 때 내가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숨이라는 이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작품과 연결해 그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정작 김숨 자신이 이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숨’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좋아서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록 작가는 특별한 의미 없이 선택했다지만 ‘숨’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생명력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잔인한 현실에서도 그 생명력을 바탕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처절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당선되며 등단한 그는 벌써 여러 단편과 장편을 내놓은 중견 작가다.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고요한 작가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 면면에 흐르는 공통적인 심상은 ‘잔혹한 묘사’로 가득한 ‘닫힌 방’ 안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들의 필사적인 이미지다. 이러한 그의 필치를 두고 소설가 박범신은 2005년 출간한 김숨의 소설집 『투견』의 추천사를 통해 김숨의 언어는 ‘식물성의 비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숨도 이러한 평에 수긍한다. “고요한 식물들의 세계야말로 가장 치열한 동물적인 공간이 아닐까 해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조용한 발악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특히 이번 소설집 『간과 쓸개』에서는 비정한 무관심으로부터 상처받고 주변인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병에 걸려 자신의 육체에서조차 소외된 노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있다. 폐병에 걸려 굳어져가는 몸에서는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고(「북쪽 방(房)」), 간암에 걸린 노인은 죽은 나무에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버섯들에게서 죽음에 매일 한발짝 가까워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찝찝함을 느낀다(「간과 쓸개」). 인물들은 짙푸른 저수지 아래 웅크린 것 같은 분위기로 타의에 의해 혹은 자처해 닫힌 방안에 육체를 유폐하고 스스로를 ‘박제’한다. “육체와 정신 모두 피폐한 사람들의 모습이 박제를 통해 가장 잘 형상화될 거라 생각했죠.” 김숨이 건축한 그로테스크한 무대 위에서 박제된 인물들은 말없이 고요한 식물의 상태를 넘어 무거운 지층을 어깨에 얹고 점차 그 무게만큼 완고한 주름을 갖게 되는 퇴적암과도 닮았다.

일상 속 그로테스크를 향한 시선

김숨이 박제된 세계를 꾸미는 장치는 분명 강렬하고 인상적인 그로테스크지만 그 표현들이 현실과 확연히 유리된 환상의 영역에 있지는 않다. 그 소재들은 현실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조각들이다. 실제로 그는 일상 속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몇몇 장면들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곧잘 ­­­­­­­발견하곤 한다고 말한다.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강렬한 느낌으로 오래 머물곤 해요. 이런 이미지들에 대한 인상이 소설 속에 투여되는 것 같아요.” 이처럼 그의 시선을 잡아끌어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러운 공포영화의 장면들이 아니다. 보고 나서 짙게 남을 비현실적인 잔상 탓에 그는 공포영화를 전혀 보지 못한다.
작은 것 속에 숨어있는 강렬함을 포착하는 날선 김숨의 촉수는 외려 ‘머리만 남아 철판에서 구워지고 있는 전어’와 같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주변의 풍경들에 반응한다. “전어를 굽는 풍경을 본 적이 있어요. 전어의 잘린 머리들만 수북하게 올라온 철판이 참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이 ‘전어 대가리들’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모일, 저녁」에서 닫혀 열리지 않는 방문 하나를 등지고 전어 대가리를 집어 아작아작 씹어 먹는 이웃집 할머니를 마주한 ‘나’에게 ‘무서워 죽을 것 같은’ 장면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암울한 무대는 현실의 변주일 뿐

그가 설정한 어둡고 음습한 공간은 그로테스크 자체를 위해 조성됐다기보다는 암울한 현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은 그들을 옥죄는 일상의 감옥을 탈주할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이러한 심연의 구덩이 속에서 구출되기 힘든 불행한 인물들의 모습을 ‘삶’이라 말한다. “소설이 암울하기 때문에 현실이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현실이 암울하기 때문에 소설도 암울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암울한 현실을 비추는 그의 화법에서 일견 허무함과 회의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보이려 했던 바가 ‘불행은 치유될 수 없다’는 단정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는 것만이 소설의 역할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상처가 있다면 그것을 도드라지게 하는 소설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만 모두 알고 있음에도 애써 쳐다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의 단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내게는 황홀했던 순간이 있었던가.”라 한탄하는 「북쪽 방(房)」 노인의 읊조림에 확성기를 가져다댄 김숨의 손길에서는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드러난다. “저는 밝게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지친 내색으로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요.” 특히 그는 『간과 쓸개』의 모티브가 됐던 노인들의 삶에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집집마다 암 환자가 한명씩 있는 시대에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고 쓸쓸하게 살아요. 그리고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언젠가 그들처럼 늙는다는 거죠.” 그래서인지 이번 소설에서는 전작에서 드러난 환상적인 분위기가 많이 축소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인물들의 초상에 힘이 실려 있다. 육체적 고통에 더해 병든 이들을 더욱 옥죄는 것은 그 고통은 자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실존의 짐이라는 것이다.

가만가만 고개를 갸웃하며 소리 없는 숨을 내쉬는 김숨에게는 ‘모래의 여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하성란 소설가는 그가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잔모래들이 경사를 따라 쓸려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했다. 햇빛으로부터 등을 지고 그림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김숨이 고개를 기울여 쏟아낼 연민의 모래알들은 앞으로 어떤 결핍의 구덩이에 채워질까. 앞으로 슈베르트의 ‘마왕’을 닮은 소설을 쓰려 한다는 그가 또 어떤 서늘한 현실의 장면들을 독자들에게 안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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