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레이 지음ㅣ 추선영 옮김ㅣ이후
종교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과 구분되는 성스러운 어떤 것, 예를 들면 아름다운 송가가 울려퍼지는 교회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지난 19일(목) 출간된 『추악한 동맹』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도전장을 내민다.

존 그레이는 인간의 폭력성을 탐구한 전작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인본주의와 그것을 반영한 진보에 대한 일반적인 신념을 비판한 바 있다. 정치 평론이라고 소개되는 『추악한 동맹』에서 저자는 서양 정치사를 넘나들면서 그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상적 원류인 종교성을 탐구하고 그것이 폭력을 불러왔다고 말한다.

그레이는 “갈등은 인간 삶의 보편적 특성”이기 때문에 유토피아는 그 속성상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력이나 강압이 영원히 제거된 사회를 염원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기획이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물러난 이라크에 자유민주주의를 심으려는 기획을 새롭게 설명한다. 갈등을 단 하나의 이상 아래 통합하려는 모든 기획을 유토피아주의로 규정하는 것이다.

현대 유토피아의 뿌리는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예수가 지상에 재림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고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을 믿은 기독교의 천년왕국주의, 조로아스터에서 기원한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관념, 역사에는 목적이 있고 그 종착점에서 선이 승리하고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역사적 목적론과 종말 신학이 그 뿌리다.
“기독교의 쇠퇴와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의 등장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선언한 그레이는 기독교가 쇠퇴했음에도 기독교적 신념들은 사라지지 않고 세속화돼 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적 신념으로 변모했다고 본다. 즉 종교를 통한 구원이 정치를 통한 구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서양의 고유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서양 문명을 다른 문명과 구분 짓는 특성은 민주주의나 관용의 전통이 아니라 역사에는 내재된 목적이 있다는 역사적 목적론이다.

그레이는 우연한 사건들이 역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흄의 회의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대처가 총리가 될 필연적인 이유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역사적 목적론을 비판한다. 이렇듯 우연에 불과한 역사에서 20세기 초의 공산주의, 나치즘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같은 거대 정치 기획은 모두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유토피아주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폭력이라는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달려온 근대인으로서는 그 목표가 한낱 꿈이라는 그레이의 말이 허무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레이는 끝내 그 허무를 채워줄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주의 정치”를 펼침으로써 나날이 제기되는 문제에 성실히 대처해 나가라는 소박한 조언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너무 허무해하지는 말자. 역사에는 정해진 목적이 없다는 그레이의 주장대로 미래는 열려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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