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권혁웅 시인

이탈로 칼비노 지음ㅣ 이현경 옮김ㅣ민음사

아름다운 이 책을 소개하는 심정이 동생에게 총애를 빼앗긴 어린아이의 속내 같다. 몰래 감춰두고 혼자만 읽고 싶은 그런 책이 세상에는 꼭 한권 있는 법이다. 내게는 이 책이 그렇다. 어렸을 때 나는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삼국지』를 읽거나 프로야구를 보면 내가 아는 사람들을 장수나 선수로 출전시켜 전투와 경기를 치르곤 했다. 사람들의 관계를 상상 속 관계로 전환시켰던 셈이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모든 관계가 다른 세계의 용어로 설명된다는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관계가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길과 교차로라는 것도. 현실의 사람과 내가 지어낸 이름들이 내가 만난 개성과 텍스트 속의 캐릭터가 때론 섞이고 때론 겹쳤다. 그때 내가 이 책을 알았더라면 나는 얼마나 멋진 건축가가 됐을까?

이 책은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의 가상 대화록이다. 칸은 지상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황제이고 마르코 폴로는 가장 많은 곳을 다녀본 여행가다. 칸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세상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폴로는 자신을 일점으로 삼아 세상을 누빈다. 전자는 세상의 주인이지만 자기 궁궐에 갇혀 있고 후자는 방랑자이지만 제가 다닌 길로 세상을 누비이불처럼 잇대어낸다. 둘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자 분신이다. 책은 모두 9부로 이루어져있으며, 폴로가 여행 중에 마주친 상상 도시들에 대한 설명이 본문을 이룬다. 각 부의 처음과 끝에는 칸과 폴로의 대화가 적혔다. 문장은 행을 이어붙인 시와 같고, 대화는 영혼끼리 나누는 대화와 같아서 삿됨이 없다.

지도란 본래 세상의 ‘표현’이다. 인간은 위도와 경도와 방위로 세상을 상징화했다. 우리는 세상 어느 곳이든지 위도, 경도, 방위만 알면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다. 상징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다. 인간에게는 손가락이 열개나 있다. 현실은 이 손가락 끝에 걸려서 열배는 부풀어 오른다. 지도는 15킬로미터에 불과한 이 지구의 지각(地殼)에 대한 묘사를 넘어서 호모 심볼리쿠스가 가진 내면성, 세계의 중심축(세계의 배꼽), 세계의 지평에 대한 인간의 상상 가능성과 불가능성 모두를 표현했다.

삽화: 김태욱 기자


이러한 점에서 보면 모든 지도의 궁극적인 모형은 『산해경』과 『신곡』이다. 『산해경』과 『신곡』은 가지 않은 곳과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며, 상상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지도이며, 내면의 내면 곧 무의식에 대한 지도이며, 죽은 자들에 대한 기록 곧 기억술에 대한 지도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두 책의 비밀을 이어받은 비서다. 책은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상상적이다. 이 책에는 통상의 지도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기억, 욕망, 기호, 교환, 죽음, 시간 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것이 도시의 외양을 하고 나타난다.

그러니 이 책은 세상보다 큰 지도인 셈이다. 통상의 지도는 다(多)대일(一) 축척을 갖는다. 지도가 상세할수록 앞의 숫자가 낮아진다. 숫자가 최고로 낮아지면 지상과 일대일 축척을 가진 지도가 탄생할 것인데, 그것은 이미 현실과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는 점에서 현실이 된 지도다. 에코는 일대일 축척의 제국 지도를 만드는 일이 어째서 불가능한가를 코믹하게 논증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책은 현실을 압축하는 상징(다대일 축척)과 현실 그 자체인 상징(일대일 축척)을 넘어서 현실 그 이상의 상징(일대다 축척)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으나 폴로의 상세한 묘사를 통해서 되살아나는 도시들은 현실을 초과하고(초현실의 도시가 이렇게 탄생한다), 현실의 잉여가 되며(현실에서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도시들이 거기에 있다), 그 자체로 비현실의 현실이 된다(아직 접한 적 없으나, 현실 어딘가에는 우리가 상상한 모든 도시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지도는 그 지도의 소유자를 지도 위의 일점으로 포획한다. 한번은 폴로가 이 지도 위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칸과 자신, 두 사람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가능성에 관해서 말했다. “이들은 우리 두 사람이 (…) 그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칸이 대답한다. “솔직히 말해, 난 한 번도 그들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그러자 폴로가 말한다.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쿠빌라이는 다시 그들이 없다면 우리가 해먹 속에 이처럼 누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론을 펴고, 폴로는 그렇다면 반대의 가정이 맞게 된다고, “그들은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칸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이곳에 있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었군.” 그러자 폴로가 부연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보이지 않는 도시들』, 151~152면)

이 복잡한 질문들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작성한 지도가 우리 정신의 텍스트에 그치는 것일 수 있을까? 우리의 생각 때문에 지도 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면? 이것은 관념론의 첫 번째 회의다. 칸은 그들을 살아있는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 회의가 다다른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칸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저들 ‘덕분’이라고, 저들의 ‘저렇게 있음’이 우리가 ‘이렇게 있음’을 보장한다고 항변한다. 이것은 유물론의 첫 번째 문제제기다. 폴로는 그렇다면 우리가 저들의 상상 속에 출현한 관념의 일종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제 완전한 역설이 제출되었다. 우리는 ‘이곳에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유령론이라 불러보자. 그것이 관념(우리 상상의 소산)이라 해도 적어도 우리의 지도는 우리의 바깥을 지시한다. 바깥이 있으므로 ‘이곳’이 있다. 이곳은 바깥의 바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들의 명백하게 ‘있음’을 증명하는 비-존재(이곳에 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있음)가 아닌가? 저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유령이었던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타자’라 부른다. 우리는 지도 작성자로서 지도에 반드시 일점으로 포획돼 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예다. 이 아름다운 책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생각의 갈래들을 만날 것이다. 그 갈래들이 모여 만들어낸 상상의 지도가 바로 이 책이다. 이제 내게는 혼자 감춰두고 읽어야 할 책이 하나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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