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추첨 민주주의

 

어니스트 칼렌바크, 마이클 필립스 지음ㅣ이지문, 손우정 옮김ㅣ이매진ㅣ191쪽ㅣ1만원
항상 선거철만 되면 한 표를 부탁하며 허리 숙여 인사하던 국회의원이 당선 후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현상. 소위 엘리트들이 국회에 입성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법률안을 가결 혹은 부결시키고 정작 필요한 민생 법안 처리는 미루는 현상. 연말이 되면 수백 건의 법안을 검토조차 하지 않은 채 무더기로 통과시키는 현상. 이런 국회의원에 염증을 느껴 투표 날 시민들이 투표장으로 가는 대신 놀러가는 현상. 『추첨 민주주의(A Citizen Legislature)』는 이러한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깨뜨리고 ‘추첨’이라는 생소한 방식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에코토피아(ecotopia)』로 더 유명한 어니스트 칼렌바크(Ernest Callenbach)와 포틀랜드 주립대 명예교수인 마이클 필립스(Michael Philips)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거’를 넘어 ‘추첨’으로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추첨으로 대표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저자들은 ‘추첨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추첨으로 대표를 뽑는 것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일까? 저자는 추첨 방식의 특성을 조목조목 분석하면서 일견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주장을 변호해 나간다. 추첨 민주주의는 누가 의원으로 선발될지 알 수 없고, 대의 민주주의와 달리 재선의 동기가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추첨으로 뽑힌 대표들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거나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보다 국민의 대표로서의 역할 수행에 보다 충실하게 된다. 즉, 자신의 이익이 곧 전체 국민의 이익을 표출하게 되는 특징을 지니게 되기 때문에 의회는 지금처럼 쉽게 조종당하지 않고 덜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 것이다.

저자는 추첨제가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것을 넘어 고유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선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후견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비를 쓰지 않기 때문에 세금을 절약할 수 있고, 다양한 배경을 지닌 추첨 의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새로운 문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또, 국민들이 자신을 공적 정책을 만드는 데 대등하게 참여할 몫을 지닌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시민 의식이 회복될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러한 추첨제의 타당성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은 과연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것일까? 저자는 의원의 3분의 1을 매년 선발하되 각 의원의 전체 임기는 3년이 되게 하고, 국민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속성이 나타날 수 있게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되지 않도록 명부를 작성해 배심원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시행할 수 있다고 나름의 방안을 내놓고 있다.

엉뚱해 보이는‘추첨’의 개념은 사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기원으로 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는 지나치게 큰 기구였기에 민회의 집행위원회 겸 운영위원회였던 ‘보울레’라는 집단이 따로 존재했다. 보울레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테네 10개 부족에서 추첨으로 선발했고, 임기는 1년이었다. 추첨을 통해서 두 번까지는 임기를 수행할 수 있었지만 세 번은 불가했으며, 보울레의 모임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어 대중과 관료 집단의 지속적이고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1992년 현역 중위의 신분으로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을 양심선언해 화제가 되었던 역자 이지문은 책의 말미에 쓴 보론을 통해 한국형 추첨 민주주의의 실현 방안을 소개하고 있다. 추첨제를 초·중·고 학급 임원, 정당과 노동조합, 지방자치단체, 중앙정부의 정책 배심, 국회의 자문위원회에 활용하고, 지금 시행되고 있는 국민참여재판제를 확대 개편해 실질적인 배심제로 전환하는 것을 보론에서 제안한다. ‘추첨 민주주의’를 시행하자는 이 책의 기발하고도 엉뚱해 보이는 제안은 과연 국민들이 올바른 정치와 바로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한국 사회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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