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회의] 법과 신뢰(법학연구소)

지난달 30일(화) 근대법학교육 백주년기념관에서 법학연구소 주최의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법과 신뢰’라는 제목의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입법학, 법철학, 형법, 민법 등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오늘날 법에 대한 신뢰란 무엇이고 이러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지를 주제로 그간 연구한 성과를 발표했다.

입법 부문 발제자 이우영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입법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입법과정에 민주적 정당성이 갖춰져야 한다”며 오늘날 한국 입법부의 성격을 진단하고 민주적 정당성의 향상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국회는 단원제면서 동시에 강한 위원회중심주의적 성격을 띤다. 입법의 효율성과 전문성을 목적으로 한 위원회가 입법과정 및 국회 제반 활동에서 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소수 몇몇 의원들에 의해 안건이 심사되고 의결돼 다원주의를 기치로 하는 민주주의의 민주적 정당성이 훼손될 여지가 있다. 이 교수는 “현재 대한민국의 입법 절차는 법제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기에 미흡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의민주제의 이상적 정체(政體)라 할 수 있는 숙의민주주의가 요구된다. 숙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개인적 선호 체계와는 어긋나더라도 토론과 심의를 통해 구성원 대다수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설득하는 과정을 요체로 한다. 이러한 정체에서는 대의민주주의의 민주적 정당성이 최대한으로 성취될 수 있다. 이 교수는 “현 국회가 입법 과정에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은 입법 과정 공개와 의제 설정에서 심의에 이르는 전 과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 확대, 숙의를 통한 입법의 질 제고를 법제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입법학 외에 형사법에서는 ‘재판 공개’를 둘러싸고 ‘국민의 알 권리’와 ‘개인정보 보호’ 등 쟁점이 논의됐다. 민법에서는 ‘계약 관계’에서의 신뢰를 증진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구체적인 법체계 내에서 구성원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연구 외에 일반론적 차원에서 제도가 신뢰를 내포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발표도 있었다. 법철학 전공 김도균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제도를 신뢰하는 것은 해당 제도에 담겨 있는 의미와 가치를 구성원들이 공유하면서 그것들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기꺼이 인정한다는 점을 함축한다”며 “신뢰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협동과 사회적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특성으로 지칭되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교수에 따르면 상호 간의 신뢰라 해서 모두 사회적 자본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친족집단이나 소규모 집단 내에서만 통용되는 신뢰는 합리성과 무관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에 대해 내부자의 정체성만을 공고하게 만드는 국지적 신뢰는 외려 사회적 자본의 형성을 저해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국지적 신뢰가 아닌 ‘보편화된 신뢰’의 창출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주목한 독일의 사회학자 클라우스 오페는 제도들이 특정한 가치를 대변하면서 신뢰를 매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오페에 따르면 신뢰가 제도를 매개로 해 발전되는 과정은 사회제도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설득력이 있는지와 낯선 이를 신뢰할 때 감수하게 되는 위험성이 얼마나 축소될 수 있을지의 두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했다. 오페가 위의 두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 특정 가치들로 제시한 것은 진실과 정의이며 제도 속에서 그 가치들이 불충분하게 실현된다면 보편적 신뢰를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손상된다. 김 교수는 “오페가 말하는 진실과 정의라는 가치의 적극적인 행동 양태인 ‘약속 지키기’와 ‘연대’를 포함한 제도의 입안이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신뢰를 이끌어내는 것에도 적용될 것”이라며 “이러한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법제도들과의 맥락에서 관련성을 해명하는 연구를 하고자 한다”고 향후 연구 계획을 언급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법학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연 단위 릴레이 학술 연구 회의의 첫 번째다. 남효순 법학연구소장은 이번 학술회의에서 “신뢰에 대한 다양한 법 분야의 시각을 조명함으로써 근본적 차원에서 법의 가치와 의미를 일깨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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