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만화 영화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하고 그들의 운명 또한 정해져 있다. 선과 악의 투쟁 속에서 선의 시련은 일시적이며 악의 패배는 확고하다. 어린이들은 선의 승리뿐 아니라 악의 패배에서도 즐거움을 느끼는데 이것은 일종의 감정교육이며 이를 통해 어린이들은 세상살이의 원리를 배워나간다. ‘쟤는 좋은 편이야 나쁜 편이야?’하는 아이들의 물음 속에는 선과 악을 판단하고 그들의 투쟁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려는 지적이고도 윤리적인 성실성이 함축돼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어린이들의 단순한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삶의 진실은 섬세하게 복잡해서 좋은 편인가 나쁜 편인가의 간단한 질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저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 속에는 어떤 나쁜 것이, 단지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 속에는 보다 거대하고 끔찍한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는 때가 있다. 이 점을 지나쳐버릴 때 우리는 우리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상하게도 악에 눈 감고 선을 내팽개쳐 버릴 수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이 책은 ‘유대인 문제 해결’의 실무를 담당한 나치스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속물적이고 관료적인 체제 안에서 개인들은 도덕적 판단에 둔감해지며, 그런 체제 안에서는 평범한 일상과 악의 식별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가운데 악마가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를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이히만을 예외적인 악마로 단순화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악마적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진실이 은폐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좋은 편과 나쁜 편을 손쉽게 가르고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를 즐기는 유아적 단순성으로부터 벗어난, 성숙한 인간의 지적이고 윤리적인 성실함.

어떤 사회적 이슈를 접할 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그것이기도 하며 우리 언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기도 하다. 일부 언론의 보도 행태는 유아적 단순성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예컨대 돈으로 후보자를 매수하는 것과 선거비용 환급을 포기하며 후보 단일화에 기여한 자에게 금전적 손실을 보전하는 것,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자에게 ‘선의’로 일정 금액을 준 것 가운데 무엇이 사실이고 이 세 항목이 각각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따져보기를 포기하기. 후보단일화의 절차적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한 경우와 정치자금법을 위반하고 차명예금을 재산신고에서 누락시켰으며 뇌물을 받고 교장·장학관 등의 부정승진을 지시한 경우를 구별하기를 포기하기. 이 단순화 속에서 우리의 판단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의 보도가 유아적 단순성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일부 언론은 주니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참 슈퍼한 주니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주문에 따라 우리가 미스터 심플이 돼가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일이다.

권희철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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