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호원숙 수필가

 

따사로운 햇빛을 머금은 노란색 집은 박완서의 미소를 닮은 듯 했다. 소천(召天)한 지 어언 8개월, 그러나 그가 디뎠던 모든 곳마다 온기는 여전했다. 지나온 모든 시대의 아픔을 껴안고 따뜻한 필치로 인간의 보통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전설이라 말하는 작가 박완서. 그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아름다운 집에서 그의 맏딸 호원숙 수필가를 만났다.

호원숙씨는 지난 4월에 출간된 박완서 문학앨범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있다』를 엮은 것을 비롯해 지난 2006년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펴낸 ‘글쟁이’다. 호원숙씨는 문인이자 딸로서 ‘박완서’라는 한국 문단의 큰 산을 떠나보낸 후 지난 8달 동안의 소회를 먼저 “그립다”는 말로 잠잠히 전했다. 그는 <세계사> 출판사에서 내년 1월 박완서 1주기를 맞아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전집의 편집위원으로 최종 교정 작업을 하는 중이라 했다. “작업을 하면서 단순히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하고 있어요. 작품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서 마치 어머니와 함께 그 시대들을 살아내는 느낌이 들어요”.

호원숙씨가 말하듯 박완서는 꾸준하게 그가 살아온 시대들을 많은 작품들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대표적인 다작(多作)의 작가다. 귀에 익은 작품들만 해도 열 손가락을 훌쩍 뛰어넘는 그를 호원숙씨는 “끊임없이 글을 썼던 치열한 작가”로 기억한다. 작고를 앞둔 며칠까지도 꾸준히 썼던 일기 속 박완서의 필체에는 평생 식지 않았던 문인으로서의 열정이 담겨있었다. 이미 한국문단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박완서지만 그는 시간을 쪼개 젊은 문인들의 신작을 읽으며 문단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호원숙씨는 “어머니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나 작품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들을 곧잘 나누곤 했다”며 “주목받는 신작이 나올 때마다 예전처럼 어머니와 함께 작품을 읽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리움을 표했다.

항상 글을 쓰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가지로 그를 보조하곤 했던 맏딸에게 박완서는 문학의 끈을 놓지 않게 해줬던 ‘문학적 멘토’이자 어디서나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호원숙씨는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어머니 박완서의 삶과 문학의 면면에 흘렀던 당당함의 원천이라 전했다. 그는 “어머니는 경시되기 쉬운 여성의 가사 노동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그에 매우 큰 가치를 두셨다”며 “‘보통 여성’으로서의 삶이 가지는 위대함을 믿으셨던 어머니의 자부심이 어디서나 어머니를 당당하게 했던 주된 이유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그가 회상하는 어머니는 ‘야무진 살림꾼’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 호원숙씨는 “어렸을 적 어머니는 재봉틀로 직접 딸들의 여름옷을 만들곤 했다”며 “어머니가 미스코리아의 몸 사이즈를 외듯이 우리의 사이즈를 부를 때 느꼈던 경쾌함과 행복감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박완서가 일기장으로 썼던 노트의 겉면에는 서울대 마크가 찍혀있었다. 서울대는 모녀에게 모두 특별한 이름이다. 박완서(국문과·50학번)와 호원숙씨(국어교육과·72학번)를 비롯한 식구들 대다수가 서울대 동문이다. 꿈으로 가득했던 스무살의 박완서에게 서울대 입학은 전쟁 통에도 늘 의지할 수 있는 자랑스러움이었다. 호원숙씨는 “어머니는 잠시나마 서울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뿌듯하게 여기셨다”고 말했다. 2006년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박완서는 “많은 기회를 줬던 ‘서울대’라는 이름에 감사하다”며 “수여받은 학위를 작은 기적처럼 또는 오랫동안 뒤통수만 보고 흠모하던 이가 뒤돌아보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준 짜릿한 기억처럼 삶이 진부할 때마다 꺼내보고 위안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내 집에 발붙이고 사는 것들 중에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던 박완서의 정원은 해사한 꽃들로 가득했다. 그가 남긴 모든 것에는 따뜻함이 배어있어 어디든 그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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