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나를 성폭행한 진 아무개씨를 두둔하고 합의를 종용하는 등 모욕감을 줬다. 판사가 내게 ‘중학교도 못 나오고 노래방 도우미도 하며 험하게 살아왔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재판장이 피해자인 나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

지난 6월 재판 중이던 강간 피해자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여성의 유서에는 피해자가 겪은 2차 피해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재판부는 “필요 이상의 모욕적인 심문은 없었고 자살은 증인의 평소 지병인 우울증 탓”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처럼 경찰·검찰의 수사와 법정 증인심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범죄의 2차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지만 오랜 문제제기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가해자 처벌이 확정되는 판결단계에서도 재판부의 자의적인 법리 해석으로 인해 2차 피해가 빈번한 실정이다.

피해자 울리는 2차 피해
신고를 결심한 성폭력 피해자가 가장 먼저 마주치는 두려움은 신상정보 유출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형사사법절차상 성폭력 피해자 보호방안에 관한 연구’ 사례 중에는 성폭력 피해 신고 후 피해자의 학교 주소와 휴대폰 번호를 입수한 가해자 가족이 합의를 종용하고 부모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한 2차 피해 사례도 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특별법) 21조에서는 피해자 정보 공개를 금지하고 있지만 형사소송법 35조에 의해 피고 측 변호인이 피해자 조사기록을 열람해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손쉽게 입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상정보 유출로 인한 가해자 측의 협박과 보복 이외에도 제 3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성폭력 피해사실이 수사기관의 부주의로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담당자의 그릇된 통념으로 인해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우선 성폭력을 사건화하기보다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시각들이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한국성폭력센터에 접수된 2차 피해 사례에 따르면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경찰이 “피해가 드러나면 수치스러울 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고소 의지를 꺾고 “합의금을 더 올려 받으려 하냐”며 금전적 이득을 노리는 것으로 비하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조사관들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를 들어 아예 고소를 접수하지 않거나 미온적인 수사태도로 일관해 수사를 진전시키지 않기도 한다.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원인은 피해 여성의 행동이나 태도로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잘못된 편견이다. 실제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의 공판에서 피고 측 변호인은 피해 여학생의 ‘문란한 평소 이미지’를 언급하며 진짜 피해자는 피고라고 주장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피해자유발론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저항 여부, 옷차림, 음주, 평소 행실, 성경험, 직업 등을 문제시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1999년 대검찰청이 발표한 ‘성범죄 수사 및 공판 시 피해자 보호에 관한 지침’에서 피해자 유발론에 근거한 성폭력 수사를 금지하고 있으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윤상 소장은 “이러한 수사 관행이 여전하다”고 밝혔다.

한편 피해자들이 수사공판과정에서 호소하는 가장 큰 고통은 피해사건이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화간(和姦:동의된 성관계)으로 몰리는 것이다. 폭력과 저항의 증거인 치상이 없는 것이 동의된 성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저항을 불능케 할 만한 폭력이 있었는지,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피해자가 증명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동의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 피해 시점으로부터 신고가 지연되거나 강간 후 도망치지 못하고 구조 요청을 하지 못했을 때도 화간으로 취급된다. 반복적으로 일어난 성폭력은 피해가 극심할지라도 그 ‘지속성’ 만으로 동의된 성관계로 해석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일례로 의붓아버지가 양딸을 4년간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 경찰은 4년간 관계가 반복됐다는 이유로 동의된 성관계로 파악해 폭행죄만 적용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통념은 재판부의 협소한 법리 해석으로 이어져 가해자 처벌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재판부는 노래방 도우미 여성이 강간을 당해 7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외음부 찰과상 등의 상해를 입은 사건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폭행·협박을 행사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으며 상해가 굳이 이 사건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는 형법 297조의 ‘폭행·협박으로 부녀를 간음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강간죄에 있어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피해 여성이 실제로 상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강하게 저항한 경우에도 ‘애초에 그러한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기도 한다. 이같은 판례들은 강간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해 원치 않은 성관계를 맺은 피해자에게 새로운 상처를 더하게 된다.

제도는 있지만...
최근 밀양 여중생 사건, 조두순 사건 등을 통해 성폭력 2차 피해가 이슈화되면서 사법기관도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는 추세다. 경찰은 의료기관, 여성가족부와 연계해 피해자 치료와 상담, 조사가 한꺼번에 이뤄질 수 있도록 원스톱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검찰과 법원 역시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하거나 담당자들에게 관련 교육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 교육은 필수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사법연수원의 한 담당직원은 “연수원은 성폭력전담판사를 위한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그들에게 교육 받을 것을 강제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여성민우회부설 성폭력상담소의 최김하나 활동가는 “지침도 제도도 잘돼있지만 관건은 이것이 얼마나 잘 지켜지느냐”라며 “현 시스템은 강제성이 없어 제도가 좋아져도 같은 2차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2차 피해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는 제도 집행자의 미약한 인권의식에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현재 명문화된 법과 지침은 훌륭하지만 이미 기존의 인식이 관행처럼 자리 잡은 상태에서 형사사법 공무원들이 그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제도를 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윤상 소장은 성폭력 2차 피해가 제도 집행자의 인권감수성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성폭력특별법이 아동성폭력 수사과정에서 녹취를 필수로 정한 까닭은 반복된 심문으로 인한 2차피해를 우려해서다. 그러나 조두순 사건에서 당시 녹음기 작동법을 미리 숙지하지 않았던 검사는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자 조사 내용의 녹음을 위해 강간상해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하는 아동 피해자에게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렇듯 2차 피해는 법안의 본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담당자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현재 2차 피해를 유발한 형사사법 공무원에 대한 징계 규정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는 거의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2차 피해를 겪은 당사자가 직접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차 피해를 유발한 해당 공무원에게 법적 제재를 가하려면 피해자가 별도로 고소를 제기해야 하지만 이미 성폭력 형사사법절차를 밟고 있는 피해자로서는 벅찬 일이기에 단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결 키워드는 '인식 변화'
이러한 경찰, 검찰, 재판부의 태도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사회 전반적인 인식 수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강간을 ‘정조에 관한 죄’로 다뤘던 초기 형법의 가부장적인 성폭력 통념이 법이 바뀐 이후에도 여전히 제도 집행자들의 인식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정조관념에 근거한 성폭력 개념은 헌법 13조 신체자유권에 반하는 소지를 지니고 있으나 ‘성폭력=정조 침해’ 인식이 워낙 우리 사회에 깊숙이 내면화되다보니 다수의 구성원들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인권 유린이 계속되는 실정이다.

한국 여성정책연구소 윤덕정 연구위원은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은 전통과 유교관념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며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정조 이데올로기가 더욱 강화돼 사회가 여성에게 이를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적 순결을 강조하는 정조 이데올로기에 따라 성폭력 범죄의 처벌이 여성의 권리 보호보다 가부장적 사회 유지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폭력 2차 피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교육’이라고 입을 모은다. 윤덕정 연구위원은 “교육을 통해 올바른 성 인식과 인권의식 함양이 전제된 담당자를 키워내야 비로소 국가의 절차를 제대로 집행할 수 있다”며 “현재 형사사법절차 담당자들을 위한 성폭력 관련 교육들이 더욱 확대되고 ‘필수교육’으로 지정돼야 한다”고 형사사법 인력 교육을 강조했다. 한국성폭력센터 이윤상 소장 역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일일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모두 경우를 상정해 제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여성 성폭력에 대한 특화교육을 로스쿨, 경찰대학, 사법연수원 과정에서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사회 전반적인 인식 수준의 개선을 위해 담당 인력뿐만 아니라 제도권 학교에서의 교육도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20년 동안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한 이윤상 소장은 성폭력 범죄가 다른 형사 범죄와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성폭력은 지극히 사회적인 범죄라는 점에서 특수합니다. 사회적 범죄에서는 행위 자체보다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매우 중요해져요.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치명적으로 심각해질 수도 있는 문제에요. 따라서 피해자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겪은 일이 어떤 일이었는지 그 실체를 인식하고 의미를 정리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제도권 안에서 피해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가해자가 이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