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일제 말기 한국 문학의 담론과 텍스트』출간한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

 

국어국문학과

‘창씨 개명’, ‘내선 일체’, ‘황국신민 서사’, ‘대동아공영권’. 이 땅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가 짓누르는 불쾌한 무게감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하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폭력적 억압이 어느 정도였냐는 차치하더라도 조선에서 자란 문인들이 일본어로, 일본의 논리에 공조하는 작품들을 쓴 이 시기는 ‘잊혀진 문학’으로 남겨져 왔다. 최근 들어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가치를 찾기 위한 국문학계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역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이라는 대립항에 갇혀 문학적 가치 자체에 대한 조명은 미약해 보인다.

정말 우리는 일제말기의 작품들에서 문학적으로 소중한, 잊혀 지지 말아야 할 가치를 발견할 수 없을까. 『대학신문』은 방민호 교수(국어국문학과·사진)를 만나 그가 10년간의 연구 끝에 출간한 『일제 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를 통해 어두워 보이기만 하는 일제 말기 한국문학사에 ‘숨겨진 별’들을 찾아봤다.

◇서문에서 “‘일제 말기 한국문학은 암흑기 문학이고 그래서 가치 있는 한국어 문학을 산출하지 못했다.’라는 통념에 맞서 미래적 가치를 창조한 작품들이 있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이후 일제 말기 한국문학은 ‘친일 문학’이라고 명명돼 왔다. 먼저 작품의 내재적 가치보다 정치적 반감을 앞세우는 ‘친일’이라는 개념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친일’이라는 개념은 사실 영역에 해당하는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지 혹은 가치 영역에 속하는 내면적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지칭하는지가 모호하다. 따라서 본 저서에서는 ‘친일’ 개념을 대일 협력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가치론으로 분리해서 고찰했다. 문학이 관심을 둬야하는 것은 후자의 영역이다. 문학에서는 작가가 실제로 대일협력을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보다 텍스트들을 연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추리·상상해 작가의 내면을 포착해야 한다.
그렇다고 명백히 대일협력을 한 작가들의 행위 자체를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대일 협력을 하지 않은 작가들 혹은 표면적으로는 협력했으나 그와 상반된 메시지를 꾸준히 전달한 작가들이 부각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본서를 저술했다.

◇현 국문학계가 호미 바바(Homi K. Bhabha)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로 대표되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론이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론에 입각해 일제 말기 문학을 분석한다고 밝혔다. 기존 이론적 관점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 무엇인가?=최근 7~8년 간 일제 말기 자료의 대상이 확장됐지만 대부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일본어 문학잡지 「국민문학」에 해당해 표면적으로 보면 일제의 논리에 공명하는 작품들이 많아 후세대를 위해 남길 것이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포스트 콜리니얼리즘 이론인 호미 바바의 양가성(兩價性, ambivalence) 개념이 도입되면서 제국에 대한 순응과 복종의 문학으로만 읽히던 이 작품들이 ‘저항’과 ‘차이’의 문학으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양가성 개념은 제국의 언어와 식민지 고유의 정신 혹은 현실이라는 상반된 속성이 공존하는 상황을 칭한다. 식민지인들이 본국의 담론을 반복, 모방함으로써 공존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식민지의 맥락에서 재구성해 차이를 만들어낸다. 즉 타자의 언어를 전유(專有, appropriate)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식민지의 정신 혹은 현실을 전달함으로써 저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도, 아프리카, 서인도제도 등과 달리 ‘한글’이라는 문자체계가 이미 정립돼 있던 한국의 상황을 상기했을 때 한국 문학에 온전히 적용될 수 없으며, 적용 과정에서도 지나치게 많은 의미가 부여돼 왔다. 분명히 일본의 논리에 동조하고 일본어로 쓰여진 천편일률적이고 정치주의적인 작품들인데 이들이 저항의 문학으로서 갑자기 심각한 분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어로 쓴 작품들에도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을 수 있지만 한국어로 쓰인 작품들에 담긴 ‘진짜’ 가치가 부각돼야 한다.

◇양가성 개념을 통한 지나친 의미 부여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겠다. 예를 들어 김사량의 소설 「풀속깊이」에 등장하는 군수는 일본어와 조선어를 공유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로서 작가 자신을 대변한다. 그가 내뱉는 일본어 연설을 보면 그의 일본어가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항상 어긋난다. 이는 호미 바바식 해석에 따르면 “일본인 내무주임을 모방하는 조선인 군수에게는 양가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모방은 항상 차이를 발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 교수님께서는 비록 김사량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 분명히 인정하고 있지만 언어 사용에 있어서의 모순적 태도로 인해 협력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셨는데, 이러한 해석은 ‘모방으로부터 차이를 찾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론의 어떤 한계를 보여 주는가?=김사량의 일부 작품들은 일본어로 쓰여진 작품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문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일본어로 작품을 썼다는 것은 중대한 타협이다. 「풀속깊이」가 양가성이 있으므로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언어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국책사업에 대한 그의 수용,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도 평가해야 한다. 나아가 김사량을 제외한 상당 수의 일본어 작품들은 2, 3류에 불과한데 어떻게 다 양가성 개념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 맥락에서 다음의 해석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효석의 『은은한 빛』에서 욱이 보이는 골동품에 대한 집착이 호리 박물관장의 욕망을 모방한 결과 생겼다는 것. 즉 외부에 의해서 내부가 발견되고, 새로이 발견된 것이 계속 존재해왔던 것처럼 인식될 때 자신의 본질이 발견되며 이것이 이효석의 미의식(자신의 본질에의 몰입)이라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조선의 거울로서 일본이나 일본인을 발견하고 여기서 다시 일본의 ‘거울’로서 조선을 발견하는 방식(대립관계항)에서 벗어나 제3항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이효석을 그 사례로 제시했는데, 두 해석이 서로 상충돼 보인다. 이효석 작품에 담긴 ‘제3항’에 대해 설명해 달라=이효석은 『은은한 빛』과 같은 일본어 소설의 존재 때문에 일제의 국책 사업에 부응한 것으로 보고 ‘친일적’이라고 평가절하 받기도 한다. 『은은한 빛』의 경우 훨씬 더 상징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 ‘위장’된 내용들을 염두에 두면 골동품이란 소설 속 소재에 대한 집착을 볼 때 작가는 외연을 넓혀 자신의 예술적 가치를 포기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풀잎」 등의 소설이다. 「풀잎」에 등장하는 준보는 전쟁과 폐허의 시대에서도 평화의 사상을 담은 월트 휘트먼의 시를 애인에게 읽어준다. 전쟁의 시대, 남성의 시대, 살육의 시대에 매우 반전적인 사상을 담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효석 연구자들은 「풀잎」을 일상적 이야기로 치부해버린다. 이뿐 아니라 『화분』과 『벽공무한』에는 일본적 이상을 표출하는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상징성과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이는 모두 의장(疑裝)에 불과하며 본격적인 논의가 이어지면서 동양과 서양을 넘어서서 절대적,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그의 가치론, 진리론이 나타난다. 이것이야 말로 조선/일본의 대립항을 넘어서는 보편성, 공통성에 대한 그의 예술적 신념이다.

◇교수님의 접근법은 학계의 기존 이론적 토대인 포스트 콜로니얼리즘과 달라 보인다. 앞으로 수반되어야 할, 혹은 계획하고 있는 연구는 무엇인가?=나의 접근법도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이다. 호미 바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학 상황을 적절하게 파악할 수 있는 도구로서 ‘한국적인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을 정립하고 싶은 것이다. 본 연구에서도 기존 이론 틀과 고립된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빌 애쉬크로프트(Bill Ashcroft) 등의 분석 도구를 차용해 연속성있는 연구를 하려고 했다. 일제 말기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본서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발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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