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커뮤니티들에 대한 참여도를 요즘 학생들의 관심을 나타내는 지표로 볼 수 있다면 이런 결과를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단지 취향과 감성의 문제라면 세대경험이 다른 내 입장에서 왈가왈부할 건 없다. 하지만 매끄럽게 그냥 넘어 가지 않는 뭔가가 있다. 그게 뭘까하고 이들의 활동내용을 키워드로 정리해 보면 ‘경력; 외국어/영어; 유학/연수’같은 것들이다. 현재와 현실, 실리와 실용. 멋이나 재미와는 거리가 먼 무채색 개념들이다. 치기(稚氣)는 없지만 여유와 재미도 없어 보인다.
“요즘 젊은이들은… ” 하는 해묵은 얘기를 또 하려는 건 아니다. 세대는 계속 바뀌게 마련이지만 세대 간 역할은 항상 비슷한 구조로 재생산되는 모양이어서 이런 얘기들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를 예전과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은 이렇게 반복되는 기성세대의 상투적인 목소리말고도 그 세대와 가까워서 그들과 더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있고, 또 학생들 자신들도 그 목소리에 공감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같은 책들에서도 현실에 대한 이런 진단은 거의 같다. 하지만 처방은 다르다. 한편에는 『김예슬 선언』이나 『요새 젊은것들』 같은 책들에서 하는 얘기가 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재빠르게 『88세대여 880만원을 꿈꿔라』라고 한다.
마이스누의 커뮤니티를 통해 볼 수 있는 서울대 학생들의 선택은 어느 쪽에 가까울까? 현재와 현실, 실리와 실용이 나쁠 건 없다. 꿈 얘기에 학생들이 거부감을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비현실적인 기대에 따르는 현실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거란다. 그런데 쓸 시간도 없을 정도로 현실을 챙기느라 바쁘고, 그에 따르는 크고 작은 위험들이 부담스럽단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니 나무랄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것과 반대쪽에 서는 선택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신선함은 그것이 현명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용감함에서 느껴지는 ‘튕김의 탄력’ 때문이다. 여기서 ‘용감(勇敢)’은 ‘겁이 없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무모하다는 뜻으로, 비현실적이란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현실이 답답하고, 그 현실에 적응하느라 피곤하고 우울하다면, 온라인에서라도 비현실적이 돼보는 건 어떨까? 아직 회원이 둘 밖에 없는 ‘까페 브라질’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이제 회원이 셋인 ‘우리꽃 동아리’나 여덟 사람이 모여 있는 ‘발레사랑’도 찾아볼만한 것 같다. 이것도 너무 용감한 일일까?
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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