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부 석사과정
이상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는 왕(때로는 여왕)이 있다. 그 왕이 물러나면 혈통에 따라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될 왕자들도 있다. 왕의 신민(臣民)은 귀족 아니면 평민으로 분류된다. 한편 이 나라에서는 왕이 총리를 임명하고 내각을 해산한다. 또 왕은 몇 가지 고유한 권한들, 이른바 대권(大權)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현대적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렇다. 이 나라는 바로 영국이다. 제3자에게 영국은 하나의 커다란 모순 덩어리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당사자들의 느낌은 어떠할까?

아마도 대다수의 영국 국민에게 있어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일 수 있다. 왕의 총리 임명권은 의례적 권한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왕의 권한은 총리의 조언에 어긋나지 않게 행사된다. 이처럼 왕실의 존재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데 있어서 결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왕은 그 옛날 제국을 구성하던 국가들의 연합체인 코먼웰스(Commonwealth)와 그 신민들을 응집하고 통합하는 구심점이 된다. 한편 왕실의 존재는 기존 질서가 성급하고 난폭하게 파괴되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준 영국인의 온건함과 분별력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덤으로 왕실의 거소(居所), 보물, 행사들은 오늘날 그 자체로 희소하고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신민’이 그들의 왕에게 충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1983년에 설립된 ‘Republic’이라는 단체는 그 인상적인 예가 될 것이다. 현재 몇몇 의원들과 리처드 도킨스(진화생물학자), 켄 로치(영화감독) 등 유명 인사들이 이 단체의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고 한다. 그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단체는 왕실 폐지를 통해 브리튼 섬과 북아일랜드의 연합‘왕국’을 ‘공화국’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 신분 제도란 ‘어느 날 영국에 우연히 도착한 외계인이라면 절대로 납득하지 못할’ 제도이며, 왕의 권한에 관한 관습과 규정은 반드시 의례적인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잠재적인 위험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폭력이 아니라 설득(심지어는 세련된 마케팅 기법)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을 선호하며, 궁극적으로 의회를 통해 왕실의 폐지를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왕국 내에서 왕의 존재와 나아가 왕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 단체의 운명은 온전히 보전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의 현행법에 빗대어 보자면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취급되거나, 형법상의 내란죄 등으로 규율될 법하지 않은가? 물론 영국에도 국왕 폐위 시도 등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는 실정법(Treason Felony Act 1848)이 있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 법은 최근 들어 평화적인 의견 개진에 관해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인권법(1998)’이 무색하게 되지 않도록 제한적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대하는 단체가 됐든, 제재하는 국왕(정부)이 됐든, 어느 편도 선뜻 결정적인 공격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감질나고 지리멸렬하기까지 한 방법을 택할지언정 말이다. 이쯤 되면 이 나라에서 절차와 의회에 대한 믿음은 신앙에 가까운 듯하다. 왕국의 목숨과 운명조차도 서슴없이 여기에 맡겨진다. 그리하여 이 ‘이상한’ 나라는 어떤 이에게는 ‘대범한’ 나라로도, 또 어떤 이에게는 ‘무모한’ 나라로도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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