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는 영국과 플랑드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만성적인 자금부족에 시달려 세금을 거둬들일 방법을 불철주야 연구했다. 그가 고안한 세금징수 방법 중 하나는 신민들에게 종군의무를 요구하고 나서 이를 면하게 해주는 대신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가옥에 설치된 난방용 화로에 부과하는 화로세가 신설됐다. 사람 수 세는 것보다 화로 수 파악하는 게 더 쉬울 것이라는 기발한 착상에 탄성이 절로 새어나오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징세관들이 화로를 헤아리기 위해 개인 집에 들어가려다 보니 충돌이 잦았고 사람들이 아예 화로를 없애고 집안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통에 화재와 사망사고도 잇따랐다.

화로세의 폐해를 인지한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창문의 개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이 창문세는 징세관이 집 밖에서 조사하기 때문에 최소한 사생활 침해 논란에서는 벗어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금 내기 싫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걸까. 주민들은 기존 주택의 창을 봉쇄하는 것으로 이에 저항했고 새로 짓는 건물에는 아예 창문을 만들지 않기도 했다. 창문세는 프랑스에도 도입됐는데 영국과 달리 과세의 기준이 창문의 폭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창문의 폭을 대폭 줄이고 상하 길이를 늘려 대응했다. 낭만적인 ‘프랑스식 창문’은 이렇게 탄생됐다고 한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화로세와 창문세가 엉뚱한 희극을 낳았다면, 일반 평민을 대상으로 한 사망세는 처절한 비극을 낳았다. 죽은 것도 서글픈데 웬 세금? 사정은 이렇다. 농부가 죽으면 영주는 그가 군역을 수행하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가장 좋은 짐승을 가져갔고, 성직자는 십일세를 다 내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두 번째로 좋은 짐승을 가져갔다. 많은 경우 농부의 가족은 재산의 33~50%를 사망세로 납부해야 했다. 결국 주요 재산을 뺏기고 난 농부의 가족은 완전히 가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귀족과 교회에 대한 농부들의 불만이 고조됐고 유럽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4세기 말 영국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런던이 일시적으로 점령되고 대주교의 목이 베어졌으며, 16세기 초 독일에서는 농민들이 수도원, 수녀원, 성을 약탈하면서 지배층의 전횡에 항거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부유층에 대한 증세안, 일명 ‘버핏세’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미국의 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된 이 방안은 부유층에 적용되는 세율이 적어도 중산층만큼은 되도록 세율을 조정하자는 내용이라 한다.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미국의 행보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새로운 희극이 연출될지 암울한 비극의 전조가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장준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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