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인 『셩경젼셔』(1911)가 출간된 지 100년이 지났다. 성경의 한글 번역이 한국기독교사에 큰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이 사실은 비단 기독교사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한국어의 골격이 채 갖춰지지 않았던 개화기에 한국인들에게 급속도로 퍼져 나가 한국어의 정립과 한국인의 언어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학신문』은 표준 한국어 정립의 학술적 토양을 제공했던 19세기 성경의 한국어 번역 과정과 내용을 돌아보며 그 의의를 짚어봤다.

광복 전인 1933년,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표준안’을 제정했다. 표준어의 제정은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규준을 마련함으로써 대중에 대한 일괄적인 교육과 계몽 작업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결속을 꾀할 수 있어 근대 국가 성립의 중요한 도구가 됐다. 일본에서도 서양식 정치 편제의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메이지 유신시기에 “교양 있는 도쿄 사람이 말하는 언어”로 표준어를 제정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를 갖지 못하고 일제로부터 지배당하고 있었던 시기에 맞춤법 표준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한국어를 지키고자 했던 국어학자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들의 노력에 자양분이 됐던 선행 작업이 있었다. 그것은 바른 번역을 위해 한국어 ‘표준’을 찾고자 노력했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글 성경 번역 작업이었다.

한글 성경 번역의 첫 장을 열다

1910년 4월 2일 전주에서 구역 번역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레널즈(William D. Reynolds)는 서울로 “번역 다 되엇소”라는 전보를 보냈다.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신구약 합본 성경인 『셩경젼셔』의 완성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1910년 말 인쇄에 착수해 1911년 3월 출간된 『셩경젼셔』는 오늘날 성경의 모습과 비슷한 현대국어의 골격을 갖추고 있다. 민현식 교수(국어교육과)는 “경전은 시간이 지나도 원문에서 많이 변화하지 않는 보수성을 띠는데 오늘날의 성경 속에도 더러 예스러운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며 “이를 보면 현대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어와 100년 전 완역된 『셩경젼셔』의 한국어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성경이 현재와 거의 흡사한 형태의 순한글로 완역된 것에는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노력이 컸다. 구약전서는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고 30년 만에 번역이 완성됐고(1910년), 이듬해인 1911년 3월 첫 한글 구신약전서가 출판됐다.

한글 성경 번역사의 첫 장을 펼친 사람은 만주에 와 있었던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해외선교부의 선교사인 영국인 로스(John Ross)였다. 그는 평안도 상인 이응찬을 고용해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으로 파견될 선교사들을 위해 1877년 최초의 국어문법서인 『한국어 첫걸음』(Corean Primer)을 제작해 국어의 발음과 문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초기 한글 성경에 대해 연구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로스는 본격적인 성경 번역에 앞서 조선인들과의 몇 차례 접촉 끝에 극소수 학자층만 읽을 수 있는 한문 대신 대다수 민중의 언어로 된 한국어 성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로스의 이러한 판단은 이후 한글 번역 성경을 접한 한국인들에게 경전 번역어가 된 한국어에 대해 격상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로스역본은 대체로 한국인 보조자가 한문 성경으로부터 한국어 초안을 만들면 이후 선교사가 ‘그리스어 성경’과의 대조를 통해 검토하고 다음날 다시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정서되는 순서로 꼼꼼하게 작업됐다.
로스가 번역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1882)를 비롯해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1882) 등 7종과 신약 전체의 첫 번역서인 『예수셩교젼셔』(1887)는 오늘날과 유사한 한국어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1883년에 간행된 로스의 『예수셩교 데자행젹』에서는 1825년까지 관보에서 “더브러”로 표기했던 것을 “더부러”(1장 14절)로 표기했다. 순음 다음에 오는 “ㅡ”가 “ㅜ”로 변천하는 현대 국어의 원순모음화가 이미 로스역에서 적용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로스의 번역본은 방언학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응찬을 비롯한 서북 지역 출신 보조원들의 영향으로 서북 방언이 한국의 모든 지역에서 이해될 것이라고 판단한 로스는 자신이 번역한 성서에 서북 방언의 고유어 표현을 더러 사용했다. 로스의 번역 성경에는 평안도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어휘인 두던(언덕), 몬주(먼지), 광지(광주리)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번역을 둘러싼 논쟁

그러나 로스가 처음 문을 열었던 한글 성경 번역에는 여러 논쟁이 따랐다. 그 중에서도 로스역이 중심으로 삼았던 서북 방언을 앞으로도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당시 주류였던 황해도 개신교와 서울 선교사들의 대립이 첨예했다. 옥성득 교수(미국 UCLA 한국기독교학)는 “당시 서울말을 채택하려 했던 로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왔던 한국인 번역자들이 의주 출신이 많아 평안도 사투리가 많이 채택돼 서울 선교사들이 로스역본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서울 번역자들이 주도한 번역 역시 양반 출신의 한국인들이 보조원이 되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한문 용어를 많이 사용하게 됐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한국어 번역 성경의 지평을 열었던 로스역본의 개정 작업은 이후에도 얼마간 계속됐다. 그러나 서울 및 중부 지역에서 한글 성경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서북 방언을 언어로 하는 로스본은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비롯해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스크랜턴(Wm. B. Scranton) 등은 1887년 언더우드의 집에 모여 ‘상임성서위원회’를 조직했고 1891년 그동안 진행해왔던 로스역의 개정 작업을 포기하는 대신 새 번역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논쟁은 철자법으로까지 번졌다. 1902년 캐나다 북장로교 소속 파견 선교사 게일은 그의 보조원 이창직과 “한 음에 한 글자”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철자법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아 ‘ㆍ’ 폐기와 ㅅ, ㅈ, ㅊ 다음에 오는 복모음을 단모음으로 변경하는 것(ex.쟈 → 자)이었다. 게일은 이 철자법을 적용해 인쇄 활자를 줄이고자 했다. 이러한 철자법 하에서는 자기 방언을 표시할 수 없다는 서북 지역 교인들의 반발에 부딪혀 1938년 『개역 성경전서』가 출간되기까지 아래 아가 있는 구 철자법이 사용됐지만 게일이 고안한 철자법은 현재 표준어 철자법에 적용돼 있다.

한글 번역 성경 속에 있는 오늘날 한국어의 조각들

한편 성서위원회에 속한 선교사들은 로스역에 대한 개정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대신 더 정확하고 올바른 성경 번역을 위해 한국어 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만열 교수는 “특히 게일이 한국어에 가장 능통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약 8만2천개의 단어를 수록한 『한영 대자뎐』이라는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국어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언급했다.

상임성서위원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몇 차례에 걸친 원문 대조와 토론 등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번역의 절차를 세분화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본 유학생으로서 성경 번역을 시도했던 이수정이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1885)에서 예수를 ‘귀신의 아들’이라는 인상을 주도록 표현한 점이 있음에도 이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한국인들에게 전파되고 있었던 점은 성서위원회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정밀한 번역에 대한 각성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게일을 비롯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은 언더우드의 주도로 1900년에 신약을 완역하고 1910년에 구약을 완역했다. 민현식 교수는 “이들의 번역은 당시 지식인들의 전 역량을 투입한 것으로, 번역 과정의 철저함을 고려했을 때 귀감이 된다”며 “위원들이 한 문장씩 원문 대조를 거쳐 번역하고 윤독하며 매 문장마다 검토를 거쳐 번역을 완성하는 절차를 통해 번역사와 국어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여러 노력을 밑바탕으로 1911년 출간된 『셩경젼셔』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글 전용 띄어쓰기를 확립하고 한자어에서 번역되지 않았던 어휘들을 창안·번역하며 국어 어휘의 확장에 힘쓰는 등 향후 표준어, 한글 맞춤법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여러 조각들을 보여주고 있다.

『셩경젼셔』는 어절 단위마다 띄어 쓰는 현대 국어의 어절식 띄어쓰기를 보여준다. 이후 개역 개정된 성경의 띄어쓰기는 이 1911년대의 형태를 대개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처럼 1925년 발표된 김소월의 시론인 「시혼(詩魂)」에서는 띄어쓰기가 돼 있지 않지만 그보다 이전이었던 1911년의 『셩경젼셔』에서는 현재의 띄어쓰기와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모국어로 문학 활동을 전개해 갔던 대표적인 문인 김소월의 시론에서도 한문과 한글의 병용, 붙여쓰기가 드러나는 것처럼 당시 한국에서 출간됐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한문 문화권에서 이어져왔던 붙여쓰기가 이용됐다. 민현식 교수는 이를 “붙여쓰기의 한자 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나 한글 전용 띄어쓰기를 경전 번역에서 시도해 1세기 만에 성공적으로 국어의 보편적 문체로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성경 번역이 오늘날의 맞춤법에 기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국어 어휘의 확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도 『셩경젼셔』가 가진 강점이다. ‘부활’은 『셩경젼셔』에서의 언급과 그 전파를 통해 현대 한국어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어휘로 자리하게 된 대표적인 어휘다. 사실 ‘부활’은 1864년 천주교 자료인 『셩교졀요』에 한번 언급된 적이 있으나 많이 쓰이지 않았다. 1884년 고유어 사용을 원칙으로 했던 로스역본에서 ‘다시 살아나다’라는 뜻의 이 어휘는 1911년 『셩경젼셔』에서 ‘부활’이라는 어휘로 정착했고 오늘날까지 남게 됐다.


한글 번역 성경을 통해 오늘날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근대 한국어’ 속에 낯선 이방인들의 손길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는 지방의 보급소와 서점을 통해 1910년에서 1912년 동안의 3년간 143만 491권의 성서를 배포했다. 옥성득 교수는 “이는 개신교 선교 첫 세대에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 성경 한 권을 줬음을 의미한다”며 “성경 번역은 한국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일깨우는 소중한 계기이자 당시 90%를 웃돌던 문맹률을 낮추는 일에 크게 일조했다”고 평가했다. 민현식 교수는 “1911년의 성서 완역은 조선의 멸망 시점에 이뤄져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을 견디기 위한 ‘한국어의 방주(方舟)’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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