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토속 리듬에서 출발한 재즈는 스윙의 율동감과 즉흥연주를 통한 개성, 화음의 폭넓은 변화가 돋보이는 음악의 한 장르다. 1920년 대 말 서양문물 중 하나로 소개된 재즈는 90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내에 자리해왔다. 전성기와 암흑기를 거듭하며 맥을 이어온 국내 재즈는 뮤지션들이 국내외에서 입지를 다지고,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등 정상급 재즈음악가들과 교감할 수 있는 공연이 점차 늘면서 2000년대 이후 성장하기 시작했다. 재즈 진원지인 미국에 비하면 국내 재즈계는 아직 협소하지만 최근 스펙트럼을 넓혀온 몇몇 작품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어울림이 두드러지거나 원곡에 재즈를 입혀 색다른 묘미를 준 재즈 앨범들을 만나보자.

저마다의 개성을 오롯이 담은 재즈 앨범

재즈는 잦은 즉흥연주를 특색으로 한다. 기본적인 곡의 코드 흐름만 주지한 채 마음가는대로 연주해가는 재즈의 즉흥 연주는 뮤지션 저마다의 개성을 확연히 드러낸다. 악보에는 담을 수 없는 재즈의 이러한 비정형성은 뮤지션이 가진 각양각색의 보컬과 연주 기량을 더욱 잘 드러낸다. 뚜렷한 개성으로 듣는 이의 귀를 자극하는 재즈음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윤선의 『Same girl』(①,2010)에 수록된 곡들은 모두 저마다의 특색을 드러내며 반짝인다. 수록곡은 줄곧 베이스와 드럼 사용을 절제해오다 나윤선의 보컬과 악기의 조합이 한데 어우러지는 3번 트랙 「Breakfast In Baghdad」에서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 노래는 가사 대신 아무 뜻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인 ‘스캣’으로 불려 긴장감을 팽팽히 유지하면서 듣는 이를 압도한다. 나윤선은 이 곡에서 몽환적이면서도 풍부한 성량을 십분 드러낸다. 여기에 재즈에 잘 쓰이지 않는 아랍 악기의 빠른 반주가 덧대져 곡에서는 바그다드의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팬케익/아이스크림/프렌치 프라이…’등 먹을거리가 가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Pancake」은 단순한 리듬과 재미있는 가사를 부르짖듯 노래하는 보컬이 돋보이는 곡이다.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던 기타소리가 하나둘 절정을 향해 모여들어 터질 듯한 팽팽함을 자아내면서 곡은 점차 고조된다.
웅산은 앨범 『Yesterday』(②,2007)에서 마이크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노래하는 ‘토치 송’ 창법으로, 강렬한 느낌의 전작과는 다른 개성을 선보였다. 그가 목소리의 힘을 덜고 편안하게 부른 타이틀곡 「Yesterday」를 듣고 있자면 나른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한없이 편안하기만 한 느낌의 곡이 담고 있는 것은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는 이별의 심정이다. 잔잔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곡의 가사를 귀담아 듣다보면 곡의 편안함은 이별 뒤 맥없이 슬퍼하는 이의 넋두리라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I sing the blues」는 블루스 느낌이 묻어나는 걸쭉한 창법으로 노래한 곡이다. 허스키한 보컬과 어우러지는 트럼펫의 진한 음색은 진득하고도 감성적인 블루스 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떠나간 사랑을 위해서/…/그리운 그대를 위해’ 서글프면서도 나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누군가는 오늘도 어딘가에서 ‘나는 블루스를 부른다(I sing the blues)’고 노래하며 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지 않을까.

 

재즈 선율을 덧입고 새롭게 다가서는 장르들의 향연

다른 장르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틀을 가진 재즈는 클래식, 대중음악 등의 다른 장르를 끌어들여 기존 곡에 ‘재즈스러움’을 덧입히는 일이 잦다. 익숙한 선율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낯익은 음은 온데간데없고 곡은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재즈곡으로 거듭난 한국 전통가요들이 즐비한 말로의 『동백아가씨』(③, 2010). 타이틀곡 「동백아가씨」는 원곡의 서정적 분위기를 주축으로 피아노 선율과 말로의 보컬을 더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재해석했다. 곡은 원곡보다 느린 박자로 전개돼 듣는 이의 가슴을 오랫동안 저릿하게 만든다. 청아한 음색이 돋보이는 원곡과 달리 말로는 낮고 허스키한 음색으로 곡을 소화해 ‘그리움에 지쳐서/울다 지쳐서’ 그저 심정을 잔잔히 읊조리는 여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진득한 허밍으로 시작해 님을 떠나보낸 애상을 배가시키는 「하얀나비」 역시 김정호 원곡의 서글픈 분위기는 유지하되 기존의 보컬과 차별을 둬 색다름을 전한다. 원곡자가 걸쭉한 음성으로 슬픔을 내보이려 했다면 말로는 기교를 섞지 않은 담백한 음색으로 이별을 삼켜낸다. 가슴 쥐고 견뎌보려는 이별의 아픔은 구슬픈 하모니카 간주와 어우러져 더 쓰리게 들려온다.

약박에 악센트를 주는 재즈의 특성처럼 약자에게 힘을 주는 따뜻한 재즈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재즈 피아니스트 곽윤찬의 앨범 『Noomas』(④,2005)의 곡들은 밝고 편안하다. 클래식, OST 등 다양한 장르의 원곡들은 그가 두드리는 건반을 거치며 다채롭게 변모한다. 「Beethovenesque」는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2악장에 바탕을 둔 곡이지만 두 곡은 판이하다. 건반을 힘껏 내리치며 줄곧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창의 선율이 긴박하다면 곽윤찬의 곡은 밝고 산뜻한 분위기로 원곡의 슬픔을 누그러뜨린다. 좀 더 곡에 몰입하면 피아노 선율에 가려진 드럼과 베이스 연주가 들린다. 발랄한 피아노, 줄을 뜯을 때마다 깔끔한 저음을 내는 베이스, 간간이 두드려져 흥을 돋우는 드럼의 조화로 곡은 부드럽게 약동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 삽입곡으로 잘 알려진 「When you wish upon a star」는 언뜻 원곡과 비슷해 보이지만 곽윤찬은 연주 악기를 재구성해 또 다른 분위기를 살려냈다. 원곡은 도입부에서 피아노를 느리게 연주하며 차분하게 곡을 진행해 가는데 반해 곡은 초반부터 피아노 대신 드럼을 등장시켜 리듬감을 강조한다. 또 피아노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원곡과 달리 이 곡에서는 피아노와 드럼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해 연주 내내 경쾌함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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