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을 다루는 웹툰 「닥터 프로스트」의 주제 중 하나는 정신적 상처는 이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이 해석되지 않은 채 상실감과 무력감으로 남을 때, 트라우마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마치 이번 전학대회의 일련의 결정들처럼.

28주 후 예정된 국립 서울대의 소멸을 막기 위해 2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던 5월 31일, 그리고 이어진 28일 동안,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할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공간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하면서, 이를 통해 많은 불가능을 극복하고 부재했던 혹은 단절되었던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결국 듣는 이를 찾지 못했다. 수신자를 찾지 못한 언어는 좀비의 웅얼거림과 다를 바 없는 듯 했다. 많은 것들이 변화했음에도 아무 것도 바꿔내지 못한 현실 속에서, 발화의 능력과 권리에 대한 자신감은 점점 사라지고 무력감과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기억을 덧칠해나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어쩌면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재계 인사와 관료가 절반을 차지하게 될,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단일한 가치를 지향하는 십여명의 사람들이 의사결정권을 전담하게 될 미래에, 서울대 졸업장을 자산이 아니라 부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사라지고 종업원과 소비자들만이 남을지도 모른다. 법인 서울대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뚜렷한 목표와 대비해 국립 서울대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모호함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미래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립 서울대는 소멸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다. 지난 시기, 철저히 잊혀졌던 존재의 의미는 소멸을 맞이하여 비로소 그 가치를 인식하게 해준다. 국립이라는 텅 빈 껍데기 속에 부재했던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의 삶과 어떻게 관계맺는지를 알아나가는 것. 루쉰이 『납함』 서문에서 말했듯, 중요한 것은 철로 된 방의 견고함이 아니라 그 속의 사람들이 얼마나 깨어있는가일지도 모른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소설 『파운데이션』에서 제국이 붕괴될 것이며 이후 3만년에 걸쳐 문명의 암흑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알아낸 수학자는 암흑시대를 천년으로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문명의 후퇴를 대비해 새로운 문명의 근원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2012년 1월 1일, 많은 것들이 변화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했던 것들을 상실했다면, 잘못된 경로에 들어서야만 했다면, 그것들을 만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설령 26년이 걸릴지라도. 설령 26년이 지난 뒤에도 만회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 할지라도. 우리가 ‘그 무엇’을 그려낼 수 있는 한.

김경근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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