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과
10월 10일 오늘은 중국의 신해혁명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혁명 결과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됐는데 이것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다. 민국이란 공화국의 다른 표현이며 이는 영문국호(Republic of China)에서 그대로 확인된다. 신해혁명을 공화혁명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때 전제군주제의 폭압 아래 신음하던 중국인은 곳곳에 “공화만세” 팻말을 내 걸었다. 나라를 잃고 중국 각지에 망명해 있던 우리 선인들은 거기서 대한독립의 희망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3·1운동에 참여한 서울의 시위 학생들 손에도 “공화만세” 깃발이 들려있었다. 공화열망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당시인은 공화정을 흔히 민주헌정과 동일시할 뿐 그 의미를 따져 보려 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화’(共和)는 원래 주나라 려왕이 폭정을 일삼다가 쫓겨난 뒤 그의 신하 주공과 소공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행한 정치를 이른다. 군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화’는 그 후 동아시아에서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리퍼블릭’의 어원인 라틴어 res publica는 ‘공공의 것’을 의미한다. 국가는 군주 한 사람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것이라는 뜻이다.

근대에 이르러 ‘공화’는 리퍼블릭의 번역어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그것은 개인이 사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보다, 동등한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자유롭게 참여해 헌신할 수 있는 ‘조건’의 확보를 요구하는 공화주의에 주목할 때 잘 드러난다. 그 ‘조건’은 공덕을 우선하는 시민윤리와 독립적 생활을 가능케 하는 경제기반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일찍이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선후관계를 분명히 했다. 서양의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이 토지균분제를 공화국의 필수제도로 꼽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힘 센 소수의 끝없는 사유충동을 제어함으로써 자유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화의 이런 의미를 살리려 한 예들도 적지 않다. 갓 탄생한 중화공화국이 군벌들의 아귀다툼 속에 비틀거리던 1916년 「신청년」에 실린 글이 눈에 띤다. 인민이 독립적 생활을 뒷받침하는 직업을 갖고 있어야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진정한 여론이 형성돼 정부와 의회를 감독할 수 있는 법인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중국의 국체는 비록 공화이나 인민의 참정권은 유명무실하게 돼 버렸다는 것이다. 이 잡지를 탐독한 학생들은 5·4운동 때 “공화만세”를 새겨 넣은 빵을 만들어 노동자에게 나눠주면서 상호 연대를 꾀했다. 중화공화국의 설계자 쑨원이 토지와 자본에 대한 소유권적 자유를 국가정책으로 제한할 것을 건국강령에 명시한 것,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추구한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임시정부 건국강령으로 채택된 것은 공화의 본뜻에 충실하려는 시도였다. 그 일부는 우리의 제헌헌법에도 이어졌다.

중국의 공화혁명 100주년에 대한공화국을 되돌아본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룩됐지만 각 분야에서 공화를 좀먹는 바이러스가 창궐한다. 교육 분야만 보더라도 국가 교육과정을 뒷골목 도로보수하듯 무시로 파헤쳐 공교육을 망가뜨리고 사교육에 길을 내준다. 무상급식을 망국의 길이라 을러대고 국립대학을 기업화하면서 자유시장이 모두를 먹여 살릴 거라 청년실업을 기만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가령 학생인권을 위해 헌신한 ‘도가니’의 주인공들처럼, 각 분야에서 공공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고 그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려 애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진정한 공화인이며 바이러스를 퇴치할 공화백신이다. 지금 그들이 서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 만세! 공화만세!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